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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웅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엄마’다
  • 김웅배
  • 등록 2017-05-02 15: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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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신록의 5월이다.


가혹했던 4월을 뒤로하고 그리스도인들은 5월의 달콤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부활의 기쁨을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고 있다. 또 세속의 우리들은 전대미문의 고약한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고 새 대통령을 뽑는 날도 들어있어 어쨌거나 정권이 바뀌는 모습을 꽃놀이패를 즐기듯이 바라보고 있다. 


여름 문턱에 들어서는 ‘입하’는 5월 5일 어린이 날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을 항상 애틋하게 만드는 어머니날도 당연히 5월 안에 있다. 



어머니 날, 어머니라는 가없는 존재, 그 유무의 의미는 우리 자식들의 마음을 항상 애잔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자식이 보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고 추념일 뿐,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가없는 사랑과는 그 궤가 같을 수 없다.


5월은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으로 성모성월이다. 성모 마리아 공경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성모 마리아가 ‘세계 최초의 공인 그리스도교 신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종교를 떠나 한 여성으로 또 어머니로서의 태고적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 DNA가 모계로만 이어진다는 과학적 증명도 이젠 낯설지 않다. 그리스 신화 최초의 신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라는 사실도 단순 생명에서 정신세계로 오래 전에 넘어온 인간에게는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교회는 수세기 동안 산 위에 세워진 거대한 요새처럼 인간의 접근을 부분적으로만 허용했던 배타적 존재였다. 물론 그 철벽같은 요새 안에서 성벽을 넘으려는 아니, 성벽을 넘은 훌륭한 종교지도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러한 물리적 성곽 같은 교회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루터가 주도한 부패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 의지는 당시 가톨릭이 지배했던 속세 정치 세력의 반발과 교회의 억압에 신물이 나있던 대중들의 힘이 합쳐져 종교개혁이라는 신학적 사회적 사상의 변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혁명에 대한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늑장대응은 침체에 침체를 가중 시켰고 급기야는 20세기 중반에 가서 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응답했다. 그전까지도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는 신자들을 등 뒤로 두고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고 알아듣지 못하는 신자들은 머리를 묻고 마리아에 대한 묵주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지식인 신자들은 통상문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는 라틴어 미사에 참여했다는 자기 현시적 기만에 빠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묵주기도를 주문처럼 외우는 건 결코 잊지 않았다.


▲ 2차 바티칸공의회


인류 정신세계에 여신 숭배가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공경으로 넘어온 과정은 인류의 문화사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러한 과정 안에는 미신이라고 불리는 샤머니즘을 비롯한 원시 종교를 거쳐 계시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종교적 행위가 망라되어 있다. 자식들이 잘되라고 정한수를 한 그릇 떠놓고 산신령에게 비는 우리나라 옛 어머니들의 지성이 미신으로 간주되는 것에는 마음이 불편하다. 


인간의 본능 속에서 어머니와의 무조건적 교감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기 훨씬 전 미토콘드리아만큼이나 체내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갓난아이의 알 수 없는 옹알거림도 자신에게 하는 말로 찰떡같이 알아듣는 어머니를 보면서, 주문을 외우는 듯한 어리석어 보이는 신자들의 묵주기도가,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찬미의 메시지가 아니라고 어느 누가 폄하 할텐가! 


가톨릭교회에는 ‘성모칠고’ 묵주기도가 있다.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 일어났던 7가지 고통과 슬픔을 통해 신심을 키우는 기도다.  


첫 번째 고통은 랍비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안아들고 마리아가 나중에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이란 예언을 한 것. 두 번째는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 가서 난민생활을 한 것. 세 번째는 파스카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일. 네 번째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 예수를 보는 고통. 다섯 번째는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모습을 본 고통. 여섯 번째는 아들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일곱 번째는 아들을 무덤에 묻은 슬픔이다.   


성모칠고는 성경에 나타난 마리아와 아들 예수와의 인간적 관계의 고통과 슬픔을 그저 담담하게 보여준다.  


첫 번째 마리아의 고통은 메시아에 대한 계시적 의미지만 나머지 여섯 가지 고통은 상황만 달리 할 뿐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모든 어머니들의 고통일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세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의 마리아 고통을 글자 그대로 받은 세월호 엄마들의 찢어지는 가슴을 우리가 어찌 헤아리랴! 


▲ 지난 4월 16일, 광주대교구 세월호 참사 3년 미사에서 세월호 미수습자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는 미수습자 9명이 모두 사랑하는 가족 품에 안겨서 집에 갈 수 있도록, 저희가 유가족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 최진


자식들이 바라보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보는 자식들의 상관관계는 유사 이래 무수한 기록과 글, 예술적 표현물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표적 예술품이 바로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일 것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인간적 삶은 여느 우리 어머니의 고단한 삶과 다름이 없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낳은 것만 다를 뿐이다. 그 모진 생애 중에 하느님께 순종하는 모습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귀감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우리의 어머니시다. 이분에게 아무리 존경과 사랑을 듬뿍 준다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도요토미 시대,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관세음보살 상을 마리아 상으로 여기고 신심기도를 바쳤다. 우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관세음보살 역시 자비의 어머니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이 드신 여성 불자들에게 보내는 ‘보살님’이란 칭호는 그래서 친근하게 여겨진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지난 1965년에 발표한 ‘성모성월에 관한 교서’에서 “교회 공동체와 개인, 가정 공동체는 성모성월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마리아에게 드리고, 기도와 찬미를 통해 마리아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삶을 두고 “하느님과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인 교회의 전형(典型)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어떤 종교적 도그마도 어린 시절 학교를 파하고 집 대문에 들어서며 부르는 “엄마아!”라는 정겨운 말 한마디만 못하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우리의 어머니와 하등 다를 게 없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아들 예수를 시켜 물이 술로 변하게 한 일 외에는!   


5월을 가정, 어린이, 어머니의 달로 정한 세속의 관례는 가톨릭 전례력에서 5월을 성모성월로 정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석가모니 탄생일도 사월초파일, 양력으론 대개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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