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 것을 싫어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자체를 혐오한다. 세상의 이치나 현상을 좌와 우, 이분법의 눈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좌와 우는 원래 한 몸이라는 것, 좌가 있어야 우가 있고 우가 있어야 좌가 있다는 것, 그래서 좌와 우는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일단 동의하지만, 그러면서도 삶의 양태와 가치관을 좌와 우로 나누거나 구분 짓는 것은 거부한다.
나는 문인으로서, 또 공정과 선을 추구해야 하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일에 대해 늘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비판정신을 시민정신의 요체로 생각하며, 양심적인 비판정신을 문인, 또는 신앙인의 기본 덕목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태도 때문인지 나는 좌파로 지칭되고 있다. 양심적인 비판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파로 지칭되는 이들에게도 건강한 비판정신은 매우 필요하다. 그럼에도 비판정신 때문에 내가 손쉽게 좌파로 낙인(烙印)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사회참여 의지와 비판적인 논조들로 말미암아 내가 박근혜 정권 시절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실을 감출 수가 없다. 좌파 문인들을 구분하고 차별하기 위해 만든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랐으니 나는 좌파 문인임이 분명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좌파 문인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젠가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자신은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라고 설파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깊이 공감했다. 나 역시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라는 생각이 더욱 명료해졌다. 그렇다. 나는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파다.
내가 그리스도파라는 사실, 또는 그 인식 때문에 내 의지 안에서 비판정신이 작동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파라는 소명 때문에 거짓과 모순이 많고 불합리한 세상일에 대해 투쟁적인 자세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19대 대선에서도 기승을 부린 색깔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막바지 대선 국면이다. 이 글이 신문에 실릴 때는 이미 대선이 끝난 상황일 테지만, 지금은 선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는 상태다.
원래는 올해 12월에 치르게 되어 있는 제19대 대선이 광화문광장의 촛불로 말미암아 7개월이나 앞당겨졌다. 19대 대선은 ‘조기 대선’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됐다. 헌정 사상 최초가 되는 2017년의 조기 대선은 ‘촛불혁명’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대선 국면에서 촛불혁명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았다. 유권자들 상당수가 촛불의 의미를 망각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부정하는 태도 쪽으로 귀착해버렸다. 촛불의 동인을 만들었던 국정농단 세력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상황이 빚어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빨간 유니폼이 당당한 품새로 거리를 누볐다. 자유한국당 유니폼의 빨간색은 이명박의 한나라당을 박근혜가 새누리당으로 개조하면서 채택한 색깔이었다. 그전까지 빨간색은 당연히 기피해야 하는 색이었다. 거부감은 물론이고 공포감마저 자아내는 색이기에 보수 세력은 기를 쓰고 빨간 색을 혐오해왔다.
그런 타성을 박근혜가 일거에 깨버렸다. 과감히 빨간색을 채택함으로써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모두를 놀라게 했다. 고정관념의 틀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되었고,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도 통용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발상의 전환은 용인되지 않았고, 고정관념의 틀은 여전히 강고했다. 그들은 빨간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누비면서도 걸핏하면 빨갱이타령을 주저리주저리 입에 담곤 했다. 빨간 유니폼과 상관없이 색깔론은 그들의 존재이유로 격상됐다. 좌파 예술인들을 가르고 차별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도 그래서 생겨났다.
촛불의 가치를 인정하는 듯이 당명도 새누리당을 버리고 자유한국당으로 바꾸었지만, 고정관념의 틀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빨간 유니폼을 착용함으로써 겉치장은 한껏 변해도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대선 국면에서 TV토론 등으로 여실히 드러났지만, 그들은 미군의 전시작전권 문제라든가 사드 문제와 관련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색깔론의 장벽을 만들곤 한다. 자유한국당 후보 홍준표는 색깔론에 노골적으로 목을 맸고, 합리적 보수로 자처하는 바른정당의 유승민도 색깔론의 함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압권은 좌파 정권에 대한 경계다. 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른정당의 의원 다수가 탈당을 결행했을 때 좌파 정권에 대한 불필요한 경계심이 노출됐다. 좌파 정권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라는 옹색한 명분을 그들은 전면에 내세웠다.
좌파의 기준도 분명치 않았거니와 왜 좌파 정권이 출현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들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박원순의 서울시와 이재명의 성남시가 보여주는 탁월한 성공 사례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든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좌파 정권의 출현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건 아닐까?
좌파 정권에 대한 경계심 역시 색깔론의 산물이다. 낮도깨비 같은 색깔론이 50대 이하 젊은 층에게는 허무맹랑한 허상에 불과하지만 60대 이상 노년층에게는 여전히 위력을 지닌 괴물임이 명백해졌다. 일찍이 낮도깨비에 농락당하며 살아온 노년층은 색깔론의 함정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다. 아직은 끝을 알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음영이며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