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4일 수요일, 맑음
1978년 3월 1일 우이동 집으로 이사를 왔다. 광주 월산동 골목길 막다른 집 6만 원짜리 끌세방(10개월치)에서 시작한 신접살림에서 시작하여, 마 신부님께서 꿔주신 25만원으로 전세방으로 옮겼고, 다 허물어져 가던 집이지만 독채전세로 40만원에 얻었을 때는 집 전부를 우리 가족이 다 쓸 수 있다는 뿌듯함에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며 자던 기억.
같이 살던 막내 도련님은 광주교대를 나와 임용이 늦어지자 살레시오 동문회 사무실에서 동창회보를 2년간 맡아 펴내다 첫 부임지 완도군 금당도로 교사발령을 갔다. 거기서 워낙 착하고 성실하게 지내다 보니 담임을 하던 반 여학생이 담임선생님을 자기네 7공주 중 셋째 언니 형부자리로 엮어주었다. 평생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고 사는 막내동서(잔소리 역시 별처럼 숱하게 하지만)를 아내로 맞이하고 나니까 초년고생에 뒤이어 복이 단체입장을 하고, 팔자가 동시다발로 피어나는 사나이가 되었다.
보스코의 직장 때문에 우리가 서울 북가좌동으로 이사를 오니 서울은 방두 칸 전세집도 200만원이나 했다. 게다가 매해 올리는 전세 값을 못 견뎌 2년을 세 살고는 우이동으로 이사 왔다. 아래층 전세 200만원을 안고 800만원에 드디어 내 집을 장만했으니 결혼한 지 4년 반만. 그때 산 그 집을 40년간 고치고 또 고쳐 지금까지 살고 있다.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데 그게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는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의논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집 장사가 지은 세 채가 난란한 골목이었다. 첫 집이 마리아네 집, 그 다음 집은 소설가 황석영 문패가 아직 달려 있었다. 골목 끝 막다른 집이 우리 집. 첫 집의 마리아는 언니 세레나, 동생 재홍이, 외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외삼춘이 살고 있었다. 셋 중 마리아가 제일 활달하여 빵기와 잘 놀아 주었고 세레나는 언니여서 의젓하고 속이 깊었다. 재홍이는 누나들 사이에 있는 사내아이여서 말이 없고 순했다. 20년 전 쯤에 길에서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던 마리아. 의정부에 산다고 했다. 그러고 35년간 세 오누이가 커서 변한 어른 모습은 못 봤다.
그러던 중 보스코의 글을 보게 된 마리아네 이모(그 당시 갓 스물을 넘겼던)가 며칠 전 연락을 해 왔다. 강화도에서 ‘베로니카의 집’이라는 펜션을 한다고, 보고 싶다고, 그곳으로 한번 오라고… 그래서 오늘 보스코 없는 틈을 타 과거를 찾아 가는 여행을 떠났다.
패북에서 본 아름다운 그 집을 나 혼자 보기 아까워, 강화도에서 제일 가까운 인천 이엘리한테 같이 가자했다. 아가다도 불렀다. 그런데 하필 베로니카가 어쩌다 다리를 다쳤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서 우리 셋은 강화도도 볼 겸 점심을 먹고 이엘리가 안내하는 까페에서 아주 편한 자세로 (누워서 커피 마셔보기는 생전 처음) 두어 시간을 놀다가 바다를 보고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보스코는 로마에서 동분서주, 큰아들 빵기는 네팔 산골짜기에서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없고, 공부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좋아하는 작은아들 빵고는 ‘운명의 장난’으로, 공부를 ‘열쒸미’ 하는 중, 하는 수 없이 서울에 홀로 남아 서울을 지키며 좋은 대통령 만나 재미에 빠진 나만 신난다(Enjoying honey-moon with President Moon!) “이만큼 행복해도 되는 건가?” 걱정하는 문빠들의 글도 간간이 보인다.
오늘 바티칸에서는 “역사상 가장 기묘한 조합”이라는 회담이 있었는데 트럼프의 교황 방문이 그것이란다. 그래도 트럼프를 감화시킬 수 있는 인물은 교황뿐이라고, “트럼프처럼 심각하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자아성찰을 한다는 것은 강줄기를 바꾸고 지구의 태양 공전궤도를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그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교황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평한다는데, 그 다음에 이루어진 일반알현에서 문대통령의 친서가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