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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감옥은 박근혜가 지키고 양심수는 가족품으로!”
  • 전순란
  • 등록 2017-06-09 10: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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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8일 목요일, 맑음


어젯밤에 온 엄엘리네한테 피곤할 테니 8시에 일어나 천천히 아침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6시가 넘자 벌써 모두 일어나 움직인다. 역시 늙은 순서대로 눈을 떴다. 보스코는 4시 30분, 나는 5시45분… 늙으면 시간도 빨리 간다. ‘남은 날이 적어’ 남아 있는 시간을 살뜰하게 쓰자면 별도리 없이 잠을 줄이는 게 제일 쉽다.


그러나 내게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엉덩이 붙일 틈이 없다. 그러면 피로가 누적된다. 일기를 쓰다보면 펜을 든 채로 졸고 있는 나를 보곤 하는데 어떤 친구들은 그만 쓰고 절필을 선언하라는 권유도 한다. 그러나 이것마저 안 쓰면 머리에 녹이 슬고 그러다보면 인생이 암담해질 거다.



아침식사를 하며 엄엘리가 “양심수 없는 나라” 용지에 서명을 해달란다. 기본적으로 민주국가라면 사상의 자유가 있어 자기 사상을 발표한다고 해서 감옥에 갇히고 ‘양심수(良心囚)’라는 명찰을 달아서는 안 된다. 기꺼이 서명을 해 줬다. 한 말씀 해 달라기에 “감옥은 박근혜가 지키고 양심수는 가족품으로!”라고 썼다.


엄엘리는 남편이 ‘통진당 사건’으로 수감되자 남편의 구명을 위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단다. 그때 박지원 의원에게 가니 “나한테 왜 이러세요? 난 못해줘요. 빨리 가요” 라며 문전박대를 하더란다. 반대로 이해찬 의원에게 가니 동북아 문제로 세미나를 하는 그 바쁜 와중에도 “내란음모라… 그거 내란음모 아냐!”라면서 선선히 서명을 해 주더란다. 훗날 이해동 목사님 출판 기념회에서 이해찬 의원을 만난 길에 지난번 서명에 고마웠다고 인사하자, “내가 말했지? 그거 내란죄 아니라고, 나도 내란음모로 두 번이나 걸렸어”라며 되게 반가워하더란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정체를 숨기다가 구체적 사안에 부딪칠 때 자기 본심을 내보인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자면서 천주교 사제들 55%, 수녀들 65%가 서명을 했었다. 그때 서명하는 주교들의 성향을 보니 국민의 정치성향 지도와 똑같이 동서로 갈렸다. 동쪽은 서명 거부, 서쪽은 서명! 단지 예외가 있다면 동쪽에서 안동교구가 찬성하고, 서쪽에서 서울교구가 반대했단다. 


2014년 교황이 한국 와서 세월호 가족들을 손잡아주고, 주교들이 모두 로마를 방문하자 교황의 첫마디가 “세월호 어찌 되었죠?”라고 묻자 주교들 태도가 좀 바뀌었다. 박근혜 탄핵 후인 올해 4월 18일은 주교회의 공시판에 ‘교구별 세월호 추모미사 공지’가 나왔다. 과연 종교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는 하나? 내가 보기엔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기득권에 편승한 집단 같다. 더구나 절도 있고 경건하게 산다는 사람들에게서 사회문제에는 냉담하고 비뚤어진 판단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오전에 엄엘리 부부와 보스코는 휴천재 텃밭의 배봉지를 다 쌌다. 나무 그늘이고 바람도 불어 별로 작업이 어렵지 않았단다. 혼자 일하기를 꺼리는 보스코가 말벗과 함께 일벗을 만나 좋아했다. 혼자서 했더라면 일주일은 걸릴 일이다. 텃밭에서 배농사는 그의 몫이고 풀을 뽑거나 밭을 돌보는 일은 내 일이기에 오후에는 내가 그들과 더불어 풀 뽑기를 했다. 셋이서 두 시간씩 일 했으니 내가 하루 꼬박 할 몫을 해냈다. 비록 먼지가 펄펄 나는 땅에서도 힘겹게 뿌리를 내리려 고생하는 잡초를 몰인정하게 뽑아서 아예 더는 못 자라 오르게 풀더미를 그 위에 쌓았으니, 잡초들에게 미안하다.


초저녁 앞산에 보름달이 떠오르는 시각, 바쁜 중에도 우리 둘을 위해 시간을 쪼개서 도와주러 온 두 사람이 서울로 떠났다. 참 고맙다. 미루도 일주일의 힐링캠프를 끝마쳤다니 많이 피로할 게다. 큰아들은 네팔에서 갓 돌아왔는데 또 한 주간 케냐로 출장을 간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엘리네도 미루도 빵기도 모두 분주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뜻으로 사는’ 삶들을 살고 있어 옆에서도 보기 좋고 본인들도 그 보람을 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한 삶’을 ‘뜻있는 삶’으로 간주하기에.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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