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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내게도 하느님께도 여전히 분주한 휴천재의 하루
  • 전순란
  • 등록 2017-06-14 10:07:07
  • 수정 2017-06-14 10: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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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3일 화요일, 흐리고 오후엔 소나기


‘경세원’ 영준씨(분도출판사와 바오로딸 외에 바깥에서 보스코의 책을 도맡아 출판해주는 벗이다)가 강변역에서 7시 함양행 시외버스를 탔다는 연락을 했다. 바쁜 사람이 갑자기 온다니 무슨 일인가 걱정도 되고, 먼 곳에서 친구가 온다니 반갑기도 하다. 10시쯤 도착할 시간이라 보스코랑 함양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보스코에게 영준씨랑 ‘상림’ 숲을 거닐며 얘기를 나누라 하고, 나의 콜에 유일하게 답한 차자씨랑 그동안 못 만난 날들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고 점심을 읍에서 대접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삼척에서 성심원에 손님으로 오신 박홍표 신부님(삼척 탈핵운동의 대부)이 보스코를 만나고 싶다하니 우리더러 그곳으로 오라는 성심원장 오신부님의 초대. CJ 셰프가 어제부터 와서 잔치를 준비하는 중이란다. 명목은 8순, 9순 할머니들의 축하식에다 성심원 나환우 전체의 소풍을 대신하는 잔치에다 그 밖에 축하해야 할 몇 가지를 모아 큰 잔치를 한단다.



영준씨도 성심원을 방문하고 싶다 해서 막 떠나려는데, 이번에는 광주 김대주교님이 부산의 양산에서 주교님들 모임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집을 방문하시겠다는 전화. 대주교님께 ‘그럼 프란치스칸들의 성심원도 방문하실 겸 그곳으로 오셔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시고 휴천재로 건너오시자’고 말씀드렸더니 그러자고 하신다.


이 소식을 듣고 제일 놀라고 제일 기뻐한 게 영준씨다. 오늘 우리집에 온 이유가 보스코를 앞장세워 대주교님을 뵈러 광주에 가려는 참이었단다. 난 속으로 (어제도 광주엘 다녀온 터이니까) ‘까딱했다간 날마다 광주 갈 뻔했다’. 


잔치는 성심원에서 오신부님이 차리시는데 우리 휴천재 손님들이 잔치상을 받으니 ‘곁불에 고기굽고’, ‘떡본 김에 제사 지낸’ 셈이다. 오신부님은 나를 점심준비에서 해방시켜 줬으니 ‘스파게티 한 끼 당신 통장에 저축’이란다. 그 인사에 나는 답례로 “문재인 대통령 바티칸 특사단을 이렇게 축하해 주시고, 거국적으로 잔치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거창한 인사를 드렸다.



8순과 9순을 맞은 성심원 어르신들 중에서도 ‘나이 너무 먹은 게 부끄럽다’고 아예 그 자리에 안 나오신 분들도 여럿이다. 그분들이 여기 성심원에 사시며 느낀 시간을 쓴 시집 「장단 없어도 우린 광대처럼 춤을 추었다」에서 읽은 시 한 편이 생각나 울컥했다.


아~ 오광대 버나 놀이

오광대 둘째마당 문둥이 놀음

무의도식 유리표박

인간사 희노애락

그 훼손된 품위도 쌓여 엉킨 울분도

탈춤으로 풀어내고 내면으로 승화시켜

내푼너푼 춤을 추자 성심원에서!

우쭐우쭐 춤을 추자 하늘을 향해! (노충진, “우리들의 무도장”)


그렇게 타인들의 험악한 시선과 천대 속에서, 자기 운명에 대한 울분과 뼛속까지 차오르는 통증 속에서 살아낸 세월이기에 80이 되고 90이 됐을 때 자랑스럽지도 애틋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것도 인생이라고 세월이 갑디다’.


대주교님과 영준씨는 휴천재로 오셔서 환담을 가졌다. 대주교님이 특사로서 로마 소회를 말씀 하셨다. 교황님이 트럼프를 만나기 전에 먼저 만나 우리나라 절박한 위기상황을 전해야 했는데 뜻대로 알현이 허락되지 않아 애가 타더란다. 그러나 파롤린 국무원장을 만나고, 그분에게 건넨 호소가 교황님의 말씀을 통해 트럼프에게 모두 다 전달되었다는, 바티칸 외무장관의 말을 사후에 전해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보람을 느끼셨단다. 교황님도 두 번이나 뵈었고…


정말 나라를 사랑하고 남북의 하나 됨을 간절히 바라시는 소망이 말씀에 골골이 스며있다. 우리가 70년 넘게 겪어온 모든 사회적 정치적 고통과 불행의 근간이 민족분단에 있음을 절감하고 계셨다.


3시경 대주교님이 광주로 떠나시고, 영준씨도 대주교님을 직접 뵙고 말씀을 드려 소기의 방문목적을 달성했노라며 3시 50분 버스로 서울로 떠나고, 배웅하러간 김에 보스코가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커트하고, 집에 돌아와서 나는 밀린 다리미질을 마저하고, 시원한 소나기가 목마른 초목을 축여주고, 유영감님은 아들이 펌프로 논에 물을 대줘 못 심은 두 마지기에 벼를 심고… 내게도 하느님께도 여전히 분주한 휴천재의 하루가 갔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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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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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7-06-17 18:42:18

    나니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럽습니다.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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