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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가슴을 석 삼번 치는 거 그건 왜 하는지’
  • 전순란
  • 등록 2017-06-16 11:24:42
  • 수정 2017-06-16 11: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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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요일 맑음


“여보! 이것 좀 봐” 보스코의 이마에는 불룩불룩 세 개의 동산이 생겨났다. 어제 열심히 감자 캐느라 방심한 사이 깔따구(각다귀)가 물었다. 나도 엊그제 쪽파 뿌리를 캐는 사이 종아리와 귓바퀴를 물려 사흘간 부어올라 고생하다가 오늘에야 좀 나아졌다. 깔따구가 물면 가운데가 구멍이 나고 몹시 가렵고 한참이나 부어올라 시골에 살며 농사짓다 제일 괴로운 일중에 하나다.


우리 큰손주 시아는 모기 알러지가 있어 물렸다 하면 몸살까지 한다. 빵기가 자기는 모기 때문에 시골생활이 힘들 거라고 했는데 며칠 전 네팔에서 돌아오자마자 아프리카 케냐 출장을 또 갔다. 말라리아 약을 상복해야 하니까 일상 모기 피해서 말라리아모기에게 헌혈하고 다니는 셈이다.


휴천재에 능소화가 피기 시작했다


세탁기는 내가 돌리고 빨래널기는 ‘교수님’ 몫


‘남편님’ 빨래널기는 제법 가지런하다 


몇 해 전 텃밭에서 머위 대를 꺾는데 뭉클해서 손을 놓고 보니 뱀! 알록달록 예쁜 색의 꽃뱀이다. “놀랬잖아! 너도 놀랐지? 그러니까 내가 가까이 오면 넌 좀 멀리가 있어” 요즘도 내가 머위 밭 가까이 가면 그가 저 멀리 피해가는 모습이 눈에 띄곤 한다. 집 옆 감나무 곁에는 지붕에 사는 구렁이인지 따뜻한 볕을 쬐거나 개구리를 잡아먹으러 오느라 가끔 눈에 띄는데 내가 가까이 가면 피한다.


어려서 친정아버지가 드시던 뱀탕을 옆에서 얻어먹은 전적이 있는 여자라(‘철의 여인’이라는 내 건강은 어렸을 적에 먹은 뱀탕에서 유래한지 모른다) 나한테서 생명의 위험을 느끼나보다. 도정 김교수 부인은 뱀을 기절하게 무서워해서 뱀이 지나가면 남편이 아내더러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니의 남편 눈에 띄는 뱀은 ‘아내를 놀라게 하는 잠재적 범법자’로 취급받아 즉결처분에 처해진단다. 그에 비하여 나 정도면 뱀과 어지간히 공생하는 사이라 해도 된다.



어제 캐온 감자를 창고에서 골랐다. 제일 크고 실하고 잘생긴 것은 사부인께로 뽑혀가고, 찍히고 상처나 못생긴 것 한 상자는 우리가 먹을 것, 자잘하여 썩썩 비벼 씻어 껍질째 푹 삶아먹을 크기는 광주 서원 수녀님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식구가 많으니 당장 없어질 게다.


수녀님들의 생활은 단순하다. 단순해서 어린이 같이 순수하여 작은 일에 만족하고 기뻐한다.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면 ‘하늘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이 실감난다. ‘하늘나라 가까운’ 분들과 교류하며 지낼 수 있으니 햇감자같은 하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좋다.




남의 집 논에 벼는 실하게 자라는데 엊그제 물을 댄 논을 갈고 논 두럭을 곱게 발라놓고 힘없이 앉아계신 유노인. 논은 그렇다 치고 아래 있는 밭에는 무얼 하실 거냐고 물으니 콩을 심으려 했지만 너무 가물어 싹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맥 놓고 앉아 있단다. 논 두럭에라도 심어야 콩씨를 건질 것 같으니 그거라도 해야 하겠단다. 


안노인이 떠난 지 벌써 5년인데도 혼자라는 게 그렇게 익숙하지 않아 이렇게 뭔가 꾸물거려도 재미가 하나도 없으시단다. 부인이 살아 계실 때도 치매와 당료로 애를 먹였는데도 그런 아내라도 살아 있음이 남편에게는 어떤 의미 혹은 삶의 보람이 되었구나…


저녁 식사 후 산보를 나가는데 부면장 댁이 콩을 심는다고 밭에 물을 대고 있다. 지난주에도 성당을 나왔지만 자기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모송은 하겠는데 가슴을 석 삼번 치는 거 그건 왜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단다. 나 역시 교리서에 “내 탓이요(가슴을 친다) 내 탓이요(가슴을 친다), 내 큰 탓이로소이다(가슴을 세 번 친다)”를 알아듣는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옥구영감님 무덤. 동네노인들이 하나둘 산발치로 자리를 옮겨 눕는다


어둑해지는 밭에서 헤마 아줌마가(아줌마에겐 유일한) 밭뙈기에서 들깨를 옮기고 강물을 주전자로 퍼다 주고 있다. 그렇게 물 줘 키운 상추를 한 움큼 얻고, 아줌마가 솎은 들깨도 한 자루 나물해 먹으라고 주셨다. 이 동네는 밭 채소는 파는 일 없이 그냥 나눠먹는 게 전부다. 네 입이 내 입이고 네 일이 내 일인 사람들과만 살 수 있다면 이곳이 천국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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