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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규) 추기경 이반 디아스의 죽음과 민주항쟁 30년
  • 조영규
  • 등록 2017-06-26 14:14:13
  • 수정 2017-06-26 14: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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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26일 < 중앙일보 > 5면,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 인터뷰


- 문규현 신부 방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혹시 교황께서 문 신부와 임수경양을 만날 계획은 없는지요.


“사제는 주교의 허락 없이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사제는 또 어떤 정치적 행위에 연루되어서도 안 됩니다. 문 신부는 이 두 가지 점을 간과 했다고 생각합니다. 성하께서는 문 신부의 방북이 바티칸의 원칙, 즉 사제가 지켜야할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문 신부의 행동은 바티칸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문 신부의 방북은 정치적 행위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役事)’를 몸소 실천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은데…


“사제가 사랑의 계시를 받았다면 그 실천은 교회를 통한 것이어야 합니다. 주교의 뜻에 순명치 않고 혼자 나선다면 이는 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문 신부가 좋은 의도를 갖고 방북했으리라 믿지만 ‘좋은 의도‘가 때론 큰 실수를 유발할 수 있고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요즘 한국사회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은 민주주의의 맹아기, 다시 말해 유치원생 정도라 볼 수 있죠. 그런데 마치 대학생인 것처럼 행동하려 합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문화, 함께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자세가 아쉽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데모크라시(민주주의)가 데모크레이지(데모를 일삼는 것)로 바뀐 것 같아요”




1989년 9월 26일 < 중앙일보 > 기사다. 당시 나라는 임수경 씨와 문규현 신부의 방북으로 대북정책에 있어 ‘통일운동의 민간이양’이라는 중요한 시점에 있었다. 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대표 임종석씨를 중심으로 한국 학생운동의 정점을 찍고 있던 시기였다. 


교회는 세계성체대회 서울개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문규현 신부의 방북으로 교회의 사회참여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견과 토론으로 교회 역시 중요한 시점에 놓여있었다. 


당시 인터뷰 기사는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 일로 인해 이후 교황대사는 인천 주안 1동 성당(주임 김병상 신부)에서 전대협 소속 인천가톨릭대학생연합 학생들로부터 계란세례를 받고 자동차는 페인트와 오물투척으로 난장이 되어 황급히 돌아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이반 디아스 당시 교황대사는 본국 바티칸으로 소환되어 돌아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987년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로 진보진영이 길을 잃었다. 야권의 대통령 후보단일화 실패로 재야운동권세력이 사분오열되며 교회도 급속하게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된다. 보수 성향의 김남수(수원), 김옥균(서울), 이문희(대구) 주교와 이반 디아스 교황대사는 교회 내 강력한 보수카르텔을 형성했다.


▲ 왼쪽부터 김남수 주교, 김옥균 주교, 이문희 주교, 이반 디아스 전 주한교황대사


1988년 초 김남수 주교가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임된 것은 천주교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회의 민주화 열기에 교회는 반대로 문을 닫아걸기 시작했다.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인권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물러난 후 보수의 정점에 있는 수원 김남수 주교를 중심으로 보수성향 성직자들이 천주교계의 분위기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 서울 김옥균 신부가 주교로 임명된 것이 한국천주교의 중심교구라 할 수 있는 서울대교구의 분위기를 변화시킨 것은 물론 다른 교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김옥균 주교는 평화방송 재단이사장으로 평화방송, 평화신문 등 교계 언론의 주요 인사와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등 주요 직책 임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문희 대주교 역시 이들과 함께 주교회의의 방향을 이끌어갔고 교계의 유력지인 가톨릭신문도 이 대주교가 속해 있는 대구대교구에서 발행함으로써 언론을 통한 교계의 보수화를 간접적으로 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 상황에서 한국교회와 로마교황청간의 교량 역할을 맡고 있는 이반 디아스 대사는 '한국의 민주화는 유치원생 정도', ‘데모크라시(민주주의)가 데모크레이지(데모를일삼는것)로 바뀌었다’는 발언을 해 한국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민주화 운동 시기에 움츠리고 있던 이반 디아스는 88년 이후 운신의 폭을 크게 넓히는 한편 한국교계의 실질적 막후조정자 역을 맡게 되었다.  


천주교 내 보수세력의 시각은 6·29선언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사실상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교회는 이제 정치활동과 사회참여를 지양하고 교회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이로써 교회 보수화는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의 방향선회와 함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민주화와 인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평신도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등이 차례로 보수화된 것도 한국천주교회의 체질 변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처럼 이반 디아스 추기경은 한국교회 체질변화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반 디아스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이 임박하던 2005년 즈음 교황 후보로 이름이 거론되는가하면 인류복음화성의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당시 2006년, 정진석 대주교가(당시75세) 추기경에 서임됐다. 


그는 로마에 거주하며 한국교회의 대주교들과 친분을 유지했고 이후 염수정 추기경 선발과 정진석 추기경의 교황청재정위원회 위원 위촉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현재 한국천주교 주교들의 보수 성향은 이반 디아스와 무관하지 않다. 1987년부터 2017년 6월 까지 30년.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배후에 드리운 교황청의 막후 실세였는지도 모른다. 


▲ 이반 디아스 전 교황대사


그의 죽음은 21세기 한국천주교회에 어떤 의미일까? 


2017년 교회언론 <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 < 가톨릭신문 > 등 천주교계 대표적 언론이 사실상 보수진영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도 천주교의 보수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예다. 교회 언론이 순수한 종교적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말한다. 이는 보수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로 다가왔다.


김기춘 구속 이후 천주교의 언론통제는 실패하고 있다. 대구희망원 사태의 진실이 SBS 지상파를 타고 보도되면서 대한민국 국민과 신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어 보도된 성가정 입양원의 ‘은비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청주교구 사제의 신자폭행사건 등 온갖 불미스러운 사건과 사고들이 연일 방송을 타고 언론에 보도된다. 


인천성모병원 노조에서 시작한 의료보험부당청구 재판에서 결국 경영주체인 천주교 인천교구는 2억여 원의 돈을 부당하게 청구한 사실이 확인돼 영업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인천교구의 거침없는 확장에는 어쩌면 또 다른 의구심을 갖게 하는 사실들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 중앙일보 > 20161118 보도에 따르면 천주교 인천교구의 관동대학교 인수과정에서 등장하는 비리사학 명지재단 이사진은 박근혜 정권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과 긴밀한 유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6월 19일, 로마에서 이반 디아스 추기경이 사망했다. 1987년 6월항쟁 30년을 맞이한 이 시기에 이반 디아스의 죽음은 교회 적폐청산의 불꽃은 아닐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보수 고위 성직자들의 임기도 이제 끝나가고, 교회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면 이제 출구를 찾기 위한 자구책들이 봇물처럼 흘러넘치리라 기대한다. ‘교회는 세상과 변화의 속도가 많이 다르다’는 말로 변화 하는 세상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욱 큰 어둠 속으로 밀려나고 세상은 이제 우리가 해 왔던 방식으로 교회를 ‘왕따’시킬지 모른다. 신자율 7.9%(2016년 갤럽조사)는 이미 ‘왕따’의 반증이다.



[필진정보]
조영규 : 한국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올바른 신앙실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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