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즈카 9,9-10) 해설
<너의 임금님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너에게 오신다>
즈카르야서의 저자는 두 명이다.
9장부터는 제2즈카르야가 기원전 3세기경에 기록하였다. 이 부분에서 나라의 윤리적·종교적·정치적 재건을 독려하기 위한 약속과 희망과 승리의 신탁(信託)들이 담겨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의 저자는 전에 있던 신탁들을 다시 다듬어서 자기 신탁들에다 합친 것 같다. 그래서 즈카르야서의 이 부분은 좀 다채로우면서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9장에서는 주님께서 유다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백성들의 여러 도시를 차례로 점령해 가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오늘 독서는 메시아다운 임금이 승리한 정의로운 임금으로서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가난한 모습을 한 임금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분은 불의하고 거만한 독재자들과 정면으로 맞서신다. 그분은 평화의 임금으로서 나귀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다. 전쟁 영웅이 군마를 타고 사납게 치닫는 모습과는 정반대다.
즈카르야의 예언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적중된다(마태 21,2이하). 그리고 말에 오르지 않은 다윗(창세 49,11 참조)을 말 위에 올라 이스라엘로 들어온 솔로몬과 그의 후계자들(열왕상 10,26-29)을 견준다. 예언자들의 전승에 나오는 모습은 언제나 말 위에 우뚝 올라앉은 모습과는 반대다(신명 17,16; 이사 31,1-3; 호세 1,7 등). 자기 자신의 힘을 믿는 사람과 하느님께만 신뢰하고 의탁하는 사람을 견준다. 스스로 자만하는 솔로몬의 태도가 나라를 망해먹은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나귀를 타신 메시아의 모습은 다윗의 겸허한 태도를 떠올리게 하고,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참된 종교 전통과도 어울린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을 정반대로 대조할 일은 아니다. 솔로몬의 영광에 관한 명백한 언급도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즈카르야는 다윗의 수난과 겸허함에다 솔로몬의 영광을 합쳐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묘사한 것 같다.
시편 (144) 해설
<나의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이 시편은 하느님의 어지심과 자애로우심을 노래하는 찬미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임금님이심을 노래하는 찬미가이다. 시편 작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온갖 파벌과 불의를 싫어하신다.
하느님의 용맹하신 행적과 기적적인 행적은 무엇보다도 당신만을 믿는 겸허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신 행적이요 기적이다. 그 행적과 기적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사랑을 돋보이게 한다.
제2독서(로마 8,9.11-13) 해설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
바오로는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불행한 처지에 대해서 말한 다음,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옛 구원경륜과 새 구원경륜을 대조한다. 동시에 바오로는 1,18-3,20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죄악의 세계를 묘사한 다음, 3,21-4,25에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이룩하신 믿음에 의한 의화(義化)를 설명한다.
구원받는 사람의 새로운 생활 방식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생활’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영적인 사람들’이라 부른다. 그와 대조적으로 자기 욕망과 이기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육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 부른다.
바오로는 구약에 나오는 영과 육의 싸움에 대한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이 대립은 그리스인들처럼 영혼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갈라놓고 보는 식의 대립이 아니다. 바오로의 신학은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을 대조하는 셈족 특유의 사고방식에서 직접적으로 영향과 영감을 받는다. 그러나 성령과 죄악이라는 이중적 체험으로 더욱 풍요로워진다. 사람은 성령의 세계에서 살 수도 있고, 죄악의 세계에 머물 수도 있다. 사람은 생명을 택할 수도 있고,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사람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급급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일을 목적으로 삼으면 죄악과 죽음의 세계에 머무는 꼴이 된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처럼 모든 사람을 하느님 자녀로 사랑하고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몸 바치고 생명까지 바치면 성령과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 된다.
복음(마태 11,25-30) 해설
<나는 마음이 온순하고 겸손하다>
마태 11,25-30은 지혜문학다운 성격을 가지고 있고(참조. 집회 51,1-30; 지혜 6,9), 요한 복음서의 문체를 떠올리게 한다(요한 3,35; 13,3; 17,2).
첫째 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비밀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계시하도록 사명을 지워주셨음을 감사드린다. 그리고 둘째 부분에서는 보잘 것 없는 그 사람들에게 당신과 친교를 맺자고 직접 초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시대에 용광로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한 세 소년의 찬미가를 당신의 말씀으로 삼으신다(다니 3,52). 세 소년의 보잘 것 없음은 바빌로니아의 뛰어나다는 현자들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바빌로니아의 현자들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그 어린이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셨다.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유능하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에게는 보여 주지 않으셨다. 자랑하는 유식함과 유능함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지 남을 섬기려는 자세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당신을 열어 보이시고 친교를 맺으시려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들 축에 끼는 한 사람이셨다. 예수님께서 만드시려는 공동체는 그렇게 겸허하고 선량하고 마음씨 착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자랑할 것도 없고, 자랑하고 싶지도 않고, 오순도순 화목한 기쁨만이 소망인 사람들, 하느님께서 자기네 어지신 아버지시라는 사실만으로 전부인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묵상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고 받아들인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온 생애 자체로 밝히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란,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자애로운 아버지시고 사람들은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라는 사실이다. 이 기쁜 소식이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 때, 그것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들은 양반 족속과 사람 종류가 다르듯이 체념하고 굴종하며 비굴하게 살아오던 상민들에게 그들도 떳떳하고 귀중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는 통렬하고 후련한 진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생명까지 바쳤던 것이다.
그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계속 남들 위에 강자로서 군림하고픈 사람들과 남들보다 한없이 잘 먹고 잘 살기만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귀찮고 방해가 되고 예리한 공격이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다. 타인들을 착취하고 희생시키고 짓밟고 올라서서 자기가 남들보다 머리 좋고 능력 있음을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속에는 기쁜 소식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 머리 좋고 유능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기껏 한다는 짓이 어떤 모양으로든 빼앗은 것을 지키고 더 뺏기 위해 무서운 무기들을 개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짓거리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이상 기쁜 소식을 거절한다.
도리어 기쁜 소식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인간이 자기 것이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을 무시할 처지도 못되고 무시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남을 짓누를 힘도 없고 짓누를 마음도 없고, 남의 것을 빼앗을 힘도 없고 빼앗을 생각도 없고, 남보다 낫다고 내세울 것도 없고 내세울 수도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꺼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기쁜 소식이라야 자기도 참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살고 살맛이 나며 힘차게 실현해야 할 일거리와 사명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사명이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사명으로서 화해와 일치의 놀라운 구원 사업임을 깨닫는다.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억눌리고 빼앗기면서 시달리는 인류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의 수난 가운데서 힘차게 인류의 화해와 일치라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창조사업인 인류 구원사업을 펼쳐나가신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굴종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한 하느님의 자녀이다.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할 수 없다. 사람이 자기의 유식함과 유능함과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것인 모든 것을 나눠 쓰지 않고 턱없이 많이 차지하고 푸짐하게 소비하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불의를 저지르는 죄악이다. 물질이란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사람들 안에 친교를 만들어주는 수단으로서 가치인 것이다.
힘없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무력하다고 자포자기하고 불의한 힘센 자들이 시키는 대로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굴종하고 이용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비겁하게 당하고만 있으면 사람답지 못한 그 사람들은 어느 세월에 참 사람다운 사람들로 변해서 구원받을 것인가?
하느님의 강력한 촉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꿋꿋이 버티고 일어서서 인류의 화해·친교·일치·평화를 위해 몸 바치라는 것이다. 이때 그들은 하느님의 힘으로 싸우게 되고,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승리하셨고, 그들도 뒤따라 승리할 것이다. 불의한 자들이 쳐 놓은 질긴 올가미를 한 올 한 올 잘라내고 헤쳐 나와야 한다. 불의한 온갖 장치를 하나씩 하나씩 깨뜨려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류가 친교의 밥상에 함께 앉아야 한다.
연중 제14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즈카 9,9-10)
<너의 임금님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너에게 오신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시편(144)
저의 임금님이신 하느님, 영영세세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제2독서(로마 8,9.11-13)
<성령의 힘으로 몸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복음(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순하고 겸손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