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칠성에서 만든 음료 중에 “2% 부족할 때”라는 게 있다. 상표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2% 부족하다는 건지, 왜 하필 2%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사람의 몸에서 수분이 2% 부족해지면 그때부터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단다. 그러니까 수분이 2% 모자라 목이 마르다고 생각될 때, 이 음료수를 쭈욱 들이키면 시원하게 갈증이 해소된다는 말이겠다. 나름 꽤나 과학적인 이름이다.
「믿는다는 것」에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도 “2%부족할 때”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런데 ‘믿는다’는 게 뭘까? ‘믿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①꼭 그렇게 여기어 의심하지 않다 ②남에게 의지하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다 ③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들다’란다. 좀 막연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나처럼 신앙인이 아닌 독자에게 ‘믿음’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영화 「타이타닉」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를 예로 든다. 여기저기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던 유명한 뱃머리 장면. 로즈가 잭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 직전, 두려움 때문인지 의심 때문인지 망설이는 로즈에게 잭이 묻는다. “나를 믿나요?”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로즈가 답한다. “그래요, 믿어요.”
드디어 로즈는 자기 몸을 잡아주는 잭을 완전히 믿으며 양팔을 벌리고 뱃머리 끝에 선다. 그리고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듯 자유와 기쁨을 만끽한다. 언제 떠올려도 멋지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지체 높은 귀족가문에서 얌전한 요조숙녀로 자라온 로즈에게서 어떻게 그런 믿음과 용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
사실, “그래요, 믿어요” 같은 말은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니다. 저자는 잭과 로즈 사이에 믿는다는 말을 할 만한 관계가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관계는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신분을 넘어서는 순수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서로에게 진실을 나누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 대한 믿음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가 나 자신의 일부가 되는 걸 느끼면서 생겨날 수 있단다(p.24). 어떻게 잭과 로즈는 동시에 서로에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아무리 훌륭한 상대라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믿음이 가기는 어렵다. 그건 믿음은 대상에 대한 앎과 지식 그리고 이해와 공감, 동의와 수긍 등을 포함한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란다. 믿음이 가능하려면 그에 앞서 상대에 대한 ‘앎’이 먼저라는 거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고, 믿음하면 떠오르는 종교도 그렇고,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건 내가 의지를 발휘해서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쌓아온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 상태란다. 길든 짧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겠다. 이런 감정은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선물처럼 주어진다면서, 이렇게 믿어진 대상은 누가 믿어라마라 할 수도 없단다. 그건 믿음의 대상이 나도 모르게 어느 틈엔가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만큼 믿음에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앎’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앎이 그리 중요하다면, 굳이 믿음이 필요할까? 합리적으로 분석한 지식에 근거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여기서 저자는,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지적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계속 흐른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공간적인 상황 역시 늘 변화하고 새로워진다. 그래서 한순간 합리적이라 여겨지던 것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단다. 이렇게 시간이라는 한계 안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생명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불완전한 생명인 인간은 그래서 본성상, 매순간 무언가를 결단해야 하는 운명이란다. 동시에 이런 속성 때문에 ‘과거’의 지식에 기초한 ‘현재’의 결단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게 바로 인간이 가진 ‘신비’ 중 하나란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믿음’이라는 거다.
무언가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택해야 할 때는, 이거든 저거든 내가 믿음이 가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안정된 존재가 아니다. 거기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안에 산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존재론적 제약을 풀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98%의 앎+2%의 용기=믿음”이라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 속에서 하나로 연결하는 공식을 제안한다. 아주 간단명료하고 논리적이며 통찰력 있는 메시지다. 무언가에 대한, 누군가에 대한 ‘믿음’에는 98%에 해당하는 오랜 시간에 걸친 앎과 2%의 결단성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니 참 절묘하다.
그렇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저자의 공식처럼 그리 간단치가 않다. 2%의 용기 있는 결단 못지않게 98%라는 앎, 이 역시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우리네의 앎이라는 게 정확하려야 정확할 수가 없다. 온갖 정보와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경험치를 총동원해서 신중하게 판단한다 해도 오류와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나만 해도 그렇다. 제법 긴 시간 함께 살아온 남편에 대해 웬만히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몰랐던 부분이 많이 드러나 새삼 놀라곤 한다. 또 서로 흉허물 없다 믿으며 의지했던 오랜 지인이 어느 날 자기는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해 한동안 멍했던 기억도 있다. 나 혼자만 그와 가까운 관계라고 착각했던 거다. 그래서 어쩌면 긴 시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앎이라든가 관계라는 게 98%라는 숫자에 훨씬 못 미칠 수도 있다. 잭과 로즈처럼 서로가 동시에 같은 느낌을 갖는다면 모르지만, 인간사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생명이 가진 존재론적 제약 탓이라니 어쩌겠는가.
그런데 신기한 건 이런저런 배신(?)을 경험하고도 내 안에는 아직도 누군가를, 무언가를 믿으려는 마음이 여전히 있다는 거다. 그건 바로 우리에게는 부모와 친구 나아가 신과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겨날 만한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기(p.49) 때문이란다. 참으로 묘한 이치다. 이리되면 좋든 싫든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을 내 맘대로 멈출 수도 없는 거다. 그러니 믿음의 대상을 제대로 알기위해, 그 앎이 98%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도 2% 정도는 스스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런 능력이 이미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니. 게다가 결단의 용기 2%는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지금 발 딛고 사는 현재를 연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일지도 모른다. 가만 돌이켜 보니 내 일상 곳곳에도 잘했든 잘못했든 수많은 선택과 결단이 스며들어있다. 그것들이 나의 과거를 만들어왔고 현재를 만들고 있으며, 미래를 만들게 되겠지.
이미 내 안에 들어있어 비껴갈 수도 없는 ‘믿음’이라는 신비한 모험,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늘 새로운 변화를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