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8일 화요일, 비오다 맑음
비 온 뒤에 해가 나니 그 습도에다 염열! 마치 찜기 위에 올려진, 갓 따온 옥수수 신세다. 사방으로 뚝뚝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 할 수가 없다. 갱년기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도 왜 땀은 안 멈출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55세를 전후하여 갱년기 현상에 많이 고생했다. 추운 겨울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부채질을 하는 나를 찬바람에 자다 깬 보스코는 아주 딱하다는 눈길로 바라보곤 했었다. 이탈리아말로는 그 힘든 시기를 ‘제2의 청춘(la secconda gioventu)’이라는, 격려의 이름을 붙여준다. ‘노망’을 ‘다시 어린이’(rimbambito)라고 부르며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너그러움이 언어에 묻어난다.
엊그제 만난 친구는 우리와 헤어지며 부지런히 임실로 떠났다. ‘아버지와 얘기를 하러’ 간단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하얗게 바래버린 나무토막 같은’ 감성의 소유자란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현재부터 점점 멀어져 중년에서 청년으로, 소년시절에서 유년시절 그리고 유아시절로 돌아가기에 갓난아기처럼 그냥 소대변을 싸고 그걸로 그림까지 그리기도 한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정말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기억’이 있어야 그 시절에 마음을 열어 행복한 정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어렸을 적의 그런 추억이 없는 사람은 감성과 언행이 사막처럼 황량하더란다. 비록 심리학도 연구한 의사이지만,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어느 구석에 남모르게 숨어있을 아름다운 추억을 꺼내러 보물찾기하러 간다니 얼마나 기막힌 아들인가!
우리 엄마 역시 내가 하루 종일 곁에 있어도 말 한마디 없다. “엄마, 물이 어디 있어요?”라고 물어도 “냉장고에”라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냉장고를 가리키고 만다. 엄마가 내게 제일 많이 들려주는 ‘얘기’는 “화전에 있는 내 땅에 내 소유의 건물이 있고, 거기서 집세가 나온다. 그 돈으로 내 밥값 내는 거고 너희들에게 손 벌리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우리 다섯 형제가 낼 수 있는 만큼 나누어서 엄마의 실버타운 생활비를 낸다고 설명해 드려도 얼마 후면 같은 말씀을 자꾸 되풀이하신다. 늙었어도 난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존심일까?
손자들, 증손자들이 인사를 와도 관심이나 반가운 표정이 아주 적다는 울 엄마 얘기에 김원장님은 엄마의 ‘전성시대’, 곧 ‘이전 농구선수 시절’ 또는 황해도 해주에서 지내던 어린시절까지를 더듬어 추억을 꺼내보라고, 그때의 천진하고 아름다운 감성을 회복하도록 도와드리란다. 엄마가 “내가 교회를 세 개 세웠는데…” 하신다던가, 교회도 못 나가신지 수년이 되었으면서도 “너희가 주는 돈은 주일헌금, 월정헌금을 한다”는 말씀이나, 우리에게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시는 행동은 어쩌면 전혀 안 그러시던 엄마가 ‘엄마의 전성시대’로 돌아가는 기억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엄마와 달리 아주 감성적이셨다.
장로님으로서 여전도회 경기남로회 회장으로서 교회활동에 올인하시고 당신이 살림에서 짜낼 수 있는 모든 돈은 교회에다 헌금하며 ‘장로님, 장로님, 우리 조정옥 장로님’으로 불리던 시절이 엄마의 전성시대였을까? 하지만 사람이 교회에서 지내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사랑하고 사랑받은 삶과 그런 추억이 인생 말미에 인간을 구원 하는데, 아주 깊은 곳에 감춰진 그 보화를 찾는 작업을 주변의 우리가 도와야한다.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해서 주변을 괴롭히는 사람보다는 엄마의 과묵함이 차라리 낫다지만, 말을 잊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마저 잃는 것 같다.
은행에 가서 유로화를 환전하고, 면허시험장에 가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현대아산병원까지 가서 체칠리아 병문안까지 하려니까 맘이 먼저 바쁘다. 보스코에게는 알아서 점심을 챙겨먹으라 했다. 그의 튀어나온 배를 보면 몇 끼 안 먹어도 되려니 하는 배짱까지 내게 생겼다.
어제 점심을 함께 하던 한국염 목사가, 20년 전, 공부가 끝나고서 ‘점심 먹고 가라’하면 ‘집에 가서 남편 밥 차려줘야 해’라면서 서둘러 갔다고 흉을 봤다. 여자의 홀로서기를 배우는 ‘여성학’을 강의하는 자리여서 내가 더 한심해 보이더란다. “이젠 지리산에 성 선생을 하루 이틀 떼놓고도 오던데 웬일이냐?”고 물어 “이젠 그도 제법 많이 컸거든. 나도 하산(下山)할 나이가 됐어”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보스코 역시 치매가 오면 아내에게 지극히 사랑받던 옛날을 기억하며 그 늙은 나날들을 견디지 않을까?
떠나기 전 내 눈으로 확인하고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아산병원으로 체칠리아 씨를 보러 갔더니 일어나 앉아 밝은 얼굴로 나를 맞는다. 작은딸 나래가 지극정성으로 곁을 지키니 마음이 놓인다. 운동을 해야 한다기에 복도를 오가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병 깊은 친구를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 안타깝다. 얼마 후에는 우리 모두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이 땅 위에 우리는 서로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떠날 것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