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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가난하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잘살고 싶지도 않았다”
  • 전순란
  • 등록 2017-07-26 10: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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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월요일, 흐리고 비


자주 잠이 깬다. 머릿속의 프로그램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잠 잘 시간과 깨어 일할 시간의 경계를 잊고 자꾸 일어나 무슨 일인가 하라는 것 같다. 2시 반에 일어났다 다시 눕고 4시에는 아예 일어나 문재인 대통령이 2011년에 쓴 「운명」을 읽는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다시 읽는 중이다. 이 책이 나오자 송기인 신부님이 읽어보라고 주셔서 그분의 심경으로, 가슴 아파하며 읽었는데 이번에 읽으며 드는 느낌은, ‘이렇게 처절하게 학습을 했으면 두 번 잘못은 안하겠지’ 싶은 안정감이다.




이제는 장관이 된 도종환 시인의 시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중략)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멀리 가는 물”」



그야말로 문재인을 두고 쓴 시 같다. 노대통령과 같은 시간을 함께 아파하고 뼈저리게 한이 묻어난 절절함… 그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과 부합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의 글 전부에 흐르는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고스란히 인생의 교육이 됐다. ‘더 이상 가난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잘살고 싶지도 않았다’는 고백은 어린 시절에 받았던 도움을 자기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선량함이 뚝뚝 배어난다.


휴천재에 머무는 정수녀님 일행이 미루의 배려로 봉화마을에 다녀왔단다. 지난 십여 년 봉화마을에 다녀오는 게 정수녀님 소원이셨다는데… 한국사회를 추동해가는 힘 하나가 가톨릭수녀님들의 투신이고 ‘노짱’에 대한 ‘정치적 사랑’이라니… 



내가 새벽에 일어나 책 읽는 곁에 시아가 아침 일찍 자리를 잡는다. 제법 두꺼운 책인데도 ‘오늘 중으로 다 읽고서 또 책 빌리러 가야 한다’는 말에는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다. 보스코도 어렸을 적에 책 살 돈이 없어, 서점에 목돈을 맡기고 매일 한 권씩 책값의 1할을 공제하면서 책을 빌려다 읽었단다. 빌린 책을 밤새워 읽고 이튿날 학교에서 돌아오며 책방에 들러 반납하고 새로 빌리기를 계속했다는데, 손주에게서 같은 취미와 행동을 보다니…


오늘 점심에는 손주들에게 피자를 구워줬다. 그런데 밀가루가 껍질째 갈아진 전밀이어서 평상시처럼 안 됐다. 부드럽지도 않고 부풀지도 않았다. 피자엔 글루텐 함량이 높아야 하는데, 영 아니다. 난생 처음 실패한 피자인데도 열심히 먹어주는 꼬마들과 보스코가 고맙다.


두 손주는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나는 며늘아기와 시내로 나가 전차를 타고 프랑스 쪽으로 가서 내가 3개월간 탈 차를 빵기랑 리스해 왔다. 푸조 2000CC인데 2년 전에 빌렸던 차종과 똑같다. 오랜만에 스틱으로 운전을 하려니까 왼쪽 다리에 쥐가 난다. 그래도 몇 년 만에 하는 운전을 몸이 기억해 내는 게 참 신기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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