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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새순은/ 아무데나/ 고개 내밀지 않는다”
  • 전순란
  • 등록 2017-07-31 14:13:39
  • 수정 2017-08-02 10: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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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9일 토요일, 맑음


동네 슈퍼 ‘미그로’에 가서 베이질 화분 한 개를 샀다. 스파게티를 하면 필수로 들어가는 향신료인데 빵기네 테라스 화단에는 없기에 오늘 심어 주었는데 잘 키울까 모르겠다. 꽃을 심거나 가꾸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려서 부모가 식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심어줄 기회가 없어서이리라. 빵기가 한번은 전화를 해서 ‘지난 가을 쟌카를로 신부님이 주신 마늘이 말라서 화분에 던져 놓았더니 싹이 나는데 한 구석에 그냥 묻어주면 되느냐?’고 물어왔다. 한쪽씩 나누어 20cm 간격으로 심고서 마르지 않게 물을 주라고 했더니 겨우내 ‘마늘 안부’를 전해왔다. 생명을 키우며 감탄하는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남보다 하나 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셈이다.


함무이는 손주들 방을 깔끔히 치워주며 행복하고…


하부이는 여전히 '공부'하느라 바쁘고…


시아가 페트병 아래쪽을 잘라 흙을 채워 무슨 씨앗인가를 심어놓고 떠나며 나더러 물도 주고 보살펴 달랬는데 오늘도 싹틀 기미가 안 보인다. 지금이야 제 사촌들과 노느라 정신없겠지만 집에 돌아 와서는 그 화분을 보살필 게다. 인간관계처럼 식물도 심기만 해서는 안 되고 마음을 주고 보살필 때 아름다운 결실을 거둔다는 사실을 깨달으리라.



새순은/ 아무데나/ 고개 내밀지 않는다.

햇살이 데운 자리/ 이슬이 닦은 자리

세상에서/ 가장 맑고 따뜻한 자리만 골라

한 알 진주로/ 돋아난다 (김종순, “새순이 돋는 자리”)


휴천재에 놀러온 정수녀님네는 대청소까지 다 해두고 당신이 거주할 쉼터로 가셨단다. 오랫동안 관구장 소임을 하셨으니 참 피곤하셨을 게다. 우리가 없어도 입안의 혀처럼 보살펴드리는 귀요미 미루가 산청에서 오가며 요모조모 도와드려 다행이다. 이신부님네가 공소에 계셔서 매일미사는 안 굶으셨단다. 


어제 해서 널은 빨래를 정리하여 제자리에 넣고서 대리미질을 하려고 집안 전부를 뒤져도 찾아낼 길이 없다. 빵기에게 카폰을 하니 즉시 답이 온다. 그냥 물어보면 이리 쉬운 걸! 인간관계도 말로 하면 쉽게 풀어낼 일을 혼자서 속으로 끙끙대며 온갖 오해를 소설로 풀어내면서 맘고생할 때가 참 많다.


빨래를 널며 애들이 뛰어놀던 아파트 놀이터가 텅 비고, 집집이 덧창이 내려진 걸로 보아 모두 여름휴가를 떠났나보다. 이태 전 바로 우리가 도착하던 날, 시아 또래의 아이가 아파트 창밖으로 엄마가 오시나 내려다보다 그만 7층에서 떨어져 꽃잎처럼 져버린 사고가 있었다. 걔 엄마는 그런대로 사는지 궁금해서 며느리에게 물어보았다.




그 집 그대로 살기는 하는데 그 시각에 집에 있던 아버지는 약물검사에서 마약성분까지 검출되어 마약복용으로, 자녀양육을 소홀히 한 죄로 감옥엘 갔단다. 그 엄만들 남은 세월을 어찌 살아갈까 가슴 아프다. 잘사는 나라나 못 사는 나라나 인간의 어리석음은 같은 크기의 아픔을 준다.


점심 먹고서 로잔느에라도 다녀오자던 보스코가 할 일이 남았는지, 움직이는 게 귀찮아졌는지 그냥 쉬잔다. 그러다 저녁을 먹고서는 속이 불편하다면서 산보를 가잔다. 그 사람이야 걷기를 죽기만큼 싫어하고 나야 걷기를 어느 때라도 즐기는 편이라 하던 일 다 접어놓고 집을 나섰다.




우리가 곧잘 산보 가는 뒷산은 알고 보니 제네바의 별장지역으로 쓰이는 고원지대다. 초지를 지나고 숲을 끼고 돌면 주라 산맥이 건너다보인다. 석양에 군무를 벌이는 새떼, 새처럼 날고 싶어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들… 산발치까지 걸어가면 아르브강이 산 밑을 끼고 흐르려니 해서 걷고 걸었지만 끝이 안 보여 그냥 돌아섰다. 


한편으로는 족히 2, 3백 평씩 토지와 잔디밭과 생울타리가 잘 다듬어진 그럴듯한 별장들이 늘어섰고, 다른 쪽으로는 쌍문동 덕성여대 땅에 ‘한평텃밭’을 부치는 것처럼, 가구당 30여 평씩의 텃밭과 세 평 정도의 오두막들이 주욱 이어져 있어 일곱 난쟁이가 백설공주랑 사는 집 같다. 집집이 주말농장으로 채소를 키우고 오늘이 토요일이어서 친구들과 바베큐를 하며 왁자지껄한 서민들의 삶도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넓은 땅과 큰 집이 필요 없음을 내 눈으로 확인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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