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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성라우렌시오의 농담: “잘 익었으니 잡숫게나!”
  • 전순란
  • 등록 2017-08-11 10: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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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0일 목요일, 맑음


오늘이 산로렌죠(라우렌시오 순교자) 축일이고 관자테 본당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산로렌죠 경당’이 있어 동네에서 경당까지 십자가의 길이 차려져 있다. 오늘은 경당에 모셔진 라우렌시오 순교자의 축일이므로 이 동네에서는 대축일이다. 경당 이 편에서 신자들이 40여명 모여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면서 십자가의 길을 지나 경당으로 들어갔다. 




로마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던 부제(副祭)였으니까 탐욕스러운 관리가 “네가 관리하는 교회 보물과 재산 전부를 갖고 오너라”고 명했단다. 라우렌시오는 약속의 날 온갖 병자와 거지와 불구자들을 한 떼 몰고서 그 관리를 찾아갔단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저희 교회 재산을 다 가져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사람들이말로 저희 교회의 재산입니다” 그렇다. 교회가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린 사람들을 편들어 존재해 왔다면 오늘처럼 늙고 텅 비고 관광객들이나 들어와 구경하다 나가는 박물관이 되지는 않았을 게다. 


집권 여당이 종교인 과세를 다시 유예하는 법안을 제출하고 총리가 유예를 추진하는 정신 나간 짓에도 가슴을 친다. 한국에서 대부분 교회나 목사님들이 면세점 이하의 빈곤층이고, 세금을 거둘 만한 대상은, 죽어도 민주당을 찍지 않을 부자들의 교회들이다. 그자들의 교회에서는 당회장 목사가 주일마다 ‘북한은 공산주의자 붉은 용’ = ‘붉은 용과 화해니 통일이니 인도적 원조니 떠드는 자들은 마귀의 세력’ = ‘따라서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은 붉은 용의 하수인’이라는 도식적 설교로 침을 튀기는 교회들인데, 그런 계층에서 내년 선거에서 무슨 표를 얻겠다는 것인지… 예수 팔아 벌어드린 돈이니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 몫으로 쓴다면 국가와 정부가 그자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제공할 텐데…



초세기부터 ‘순교자 성라우렌시오 부제’를 모셔온 경당은 몇 해 전 고고학적 발굴을 해 보니 로마제국시대의 신전 터더란다. 신전을 때려 부술 수도 없어 차라리 순교자를 공경하는 성전으로 개조하는 일은 대단한 토착화작업이다. 그렇게 태양신 아폴로를 섬기는 동지축제는 ‘예수 성탄’으로 바뀌고, 비너스를 섬기던 샘터는 ‘동정녀의 샘으로, 게르만족이 신성시하는 전나무는 ‘성탄 트리’로 바뀌어 왔다. 


경당 안에서 드리는 대축일 미사 중에 제대에 매달아놓은 둥근 박에 불을 붙여 사르는 예식이 있었다. 석쇠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한 라우렌시오의 수난과 그 영혼의 승천(“나의 밤은 어둡지 않고 모든 것이 빛날 뿐이로다”)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2000년 가까이 이어져온 행사란다. 적쇠에 구워지는 형극 중에도 돌아누우면서 형리한테 “잘 익었으니 잡숫게나!”라는 농담도 건넸다니까 생명을 영원한 분에게 맡겨드리는 참이어서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나보다. 




오전에 작은아들이랑 시장을 보고 바로셀로나에서 비행기로 직송한 배추로 김치를 담갔다. 빵고가 로마에서 고추장을 5kg이나 사온 터여서 얼큰한 걸 먹고 싶나 하여 전통적인 캠핑찌개를 했더니만 보스코와 빵고 둘 다 밥 고봉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이탈리아인들이 샐러드로 먹는 숙주가 있기에 숙주나물을 하고, 내가 가져온 단무지를 무쳤다. 



저녁식사 후에 빵고신부는 경당에서 거행되는 저녁미사와 횃불행사를 하러 다시 산로렌죠 경당으로 갔고, 보스코와 나는 이 작은 관자테 동네를 한 바퀴 산보하였다. 마을 공원 앞을 지나는데 70대 교우 아줌마가 내가 돈도메니코(Don Domenico: 빵고신부)의 엄만 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경당 미사에 가는 길이라며, 자기는 아침미사에 못 온단다. 다리 못 쓰는 아들을 돌볼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고, 그 아들이 54세인데 이혼당하고 두문불출하더니 병을 얻어 두 다리를 다 잘랐다면서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인생의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산로렌죠 경당을 향해 비츨 걸음으로 걸어가는 저 자그마한 여인의 길은 십자가를 진 분의 발걸음 그대로요, 저 멀리 석양을 받는 경당은 보물 같은 재산 하나를 품에 거둬드리는 중이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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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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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7-08-20 10:39:27

    묵상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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