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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평화를 빕니다, 당신과 당신의 나라에!”
  • 전순란
  • 등록 2017-08-14 10: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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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3일 일요일, 맑음


빵고는 아침 첫 미사를 집전해야 한다고 서두른다. 우리에게는 서두르지 말고 11시 주임신부님이 집전하는 교중 미사에 참석하라며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랄리아 성지에서 전화가 왔다. 베르또네 추기경님이 휴가를 오셔서 그 성지에서 미사를 집전하신다면서 참석하러 올 테면 오라는 말씀이었다. 지난 5월 교황청 특사단으로 바티칸에 갔을 때 베르토네 추기경을 예방한 자리에서 당신이 여름휴가를 오로파 성모성지에서 보내신다는 얘기와 오늘 그랄리아 성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주고받았으면서 보스코가 깜빡 잊고 있었단다.


재작년 경우를 보면 관자테에서 그랄리아까지는 고속도로로 두 시간 걸리는 거리. 추기경님의 미사가 11시이니까 서둘러야 했다. 보스코와 함께하는 인생을 시작하며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라!”라는 좌우명을 결혼 예물로 받아선지, 그의 요구라면 두 번도 생각 않고, 뒤도 안 보고 전진만 해온 전순란을 자부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내 말을 믿어줄까?



라고 마죠레(Lago Maggiore)부터 아오스타(Aosta)에 이르는 알프스 산맥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알프스 전초(Pre-Alpi)’라 부르는데 엊그제 관자테 같은 평원에 내린 소나기와 우박이 그곳에서는 폭설로 내렸는지 몬테로사(Monte Rosa)와 준봉들이 하얗게 눈을 쓰고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올여름의 무더위 때문인지 베르첼리 부근에선 벌써 누렇게 벼가 익기 시작한 평원을 배경으로 흰 눈 덮인 알프스는 장관이었다.


다행히 11시 정각에 그랄리아 성지에 도착했다. 베르토네 추기경님은 80년대 보스코의 학위시절에 교황립 살레시안대학교 총장이셨고, 그의 대사 시절엔 교황청 국무원장(총리)이셨으므로 보스코를 각별히 아끼고 신뢰하신 분이었으므로 보스코도 제자로서 예를 다한다. 또한 그랄리아에는 이탈리아에서 고려수지침을 시술하는 의사 오티나 선생의 별장이 있어 우리가 세 번이나 여름을 난 동네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한국대사도 참석하고 있으니 절박한 국제정세로 위기에 처한 한반도를 위해 각별한 기도를 교우들에게 당부하셨다. 내 옆에 앉았던 부부도 ‘평화의 인사’에서 “평화를 빕니다, 당신과 당신의 나라에!”라는 친절한 인사를 건네 왔다.


이곳 국영방송(RAI)도 톱뉴스로 북미대치상황을 전달하는 판이어서 우리 자신을 빼놓고 전 세계인들이 걱정을 하는데 우리만 이렇게 천하태평이어서 마치 세계인의 염려에 무임승차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하기도 하다.


추기경님은 미사가 끝나고 나와 빵고에게 프란체스코 교황님의 묵주를 선물로 주셨다. 우리에게, 한반도 사정에 교황님과 그분의 우려가 어떤 의미를 띄는지 잘 아시는 까닭이리라.




성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우리가 세 여름을 지낸 오티나네 별장을 지나면서 보니 젊은 부부가 사들어 왔는지 마당에 아기기저귀가 널려 있다. 그 옆집에 사는 티찌아나 집 초인종을 누르자 티찌아나와 남편 루카가 얼마나 반가이 맞아주는지. 인사를 나누고 환담하다 다다음주 월요일(21일)에 함께 산행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포강변의 곡창지대 베르첼리(Vercelli)를 지나 트리노(Trino)라는 마을, 그것도 공동묘지를 우리가 찾아간 까닭은 80년대의 유학시절 보스코에게 ‘중세라틴문학’을 가르치신 에우제니오 마싸 교수님 부부의 무덤이 거기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열흘 전 말펜사 공항에서 만난 여의사 다니엘라씨가 두 딸을 데리고 마중나와 트로니 공동묘지로 안내해 주어 은사님의 묘를 방문하고 짤막한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묘지 참배 후 몽페르라토(Monferrato)라고 알려진 구릉지역의 몬칼보(Moncalvo)까지 가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다니엘라 선생의 두 딸 죠르지아와 말가리타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헤어졌다. 목가적인 구릉과 포강 유역의 끝 간 데 없는 평야(Pianura Padana)를 보며 인간에게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을 새삼 감탄하며 200여km를 운전해서 관자테로 돌아왔다. 해거름에 누군가가 기다려주는 곳이 있는 사람은 복스럽다. 그게 아들이 기다리는 엄마라면 더 행복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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