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6일 수요일, 맑음
어젯밤 늦게까지 성모님을 모시고 마을 나들이를 하고서 피곤할 텐데도 할머니들 대부분이 아침 미사에 나오셨다. 우리가 살며 숨을 쉬어야 하듯 저분들에게는 미사도 삶과 밀착된 한 부분으로 아침 먹기 전 으레 또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다. 어제 제대 윗쪽으로 거창하게 자리 잡았던 네 분 성인 주교의 흉상은 치워지고, 성모님도 승천하셔서 그 자리에 안계시고, 성모성상 있던 자리엔 남루하고 상채기 투성이의 불쌍한 ‘산로코’(로코 성인)가 빵을 입에 문 비루먹은 강아지와 함께 서 있었다. 순례 다니는 성인이 굶어 쓰러질 때마다 개가 빵을 물어다 주더란다. 개가 먹여 살린 성인이랄까? 성경에는 까마귀가 먹여 살린 엘리야 얘기가 나오지만…
산로코는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거지, 나그네, 순례자,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 약사, 보험설계사, 봉사자, 개의 ‘수호성인’이고 너무 많은 구걸을 하고 다녀서 ‘무릎 아픈 사람’과 ‘관절이 망가진 사람’의 수호성인도 된단다. 아침미사에 나온 늙은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수호성인인 셈이다.
본당신부님의 부모님을 아직 못 찾아봬서 10시쯤 사제관에 갔다. 할머니는 책을 보고 계셨고 할아버지는 리소토(쌀요리)를 하느라 부엌에서 토마토를 다지고 붉은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넣고 쌀을 볶고 계셨다. 여자를 문밖에 앉혀두고 남자가 부엌일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퍽 생소한데 이곳에서는 남자도, 특히 퇴직한 남자들이 기꺼이 부엌으로 들어와 그동안 생소했던, 전혀 다른 도전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일한다. 마우로 신부님 부모님도 월말에는 아들이 12년을 지낸 이 본당을 떠나 이사를 해야 해서 집안엔 온통 이삿짐이다.
본당신부님은 8일간 시칠리아로 휴가를 떠나시고 이젠 우리아들이 ‘알바 주임’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한다. 빵고가 12시에 신부님을 보내드리고 돌아와 냉면을 먹고서 우리 둘을 모시고 효도차원 성지순례를 갔다. ‘바레세 성산 성모성지’(Sacro Monte di Varese)에 갔다.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평원이 끝나고 알프스 산맥이 시작하는 ‘알프스 초입’(Pre-Alpi)에는 무려 아홉 군데의 성산(Sacri Monti)이 있고 성산마다 ‘성모성지’(Santuario della Madonna)가 있단다. 마르틴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몰아치자 성경 말씀과 사회교리 대신에 가톨릭신자들을 순진하게 묶어두는 ‘신심운동’과 ‘자선사업’을 영성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온갖 군데에 ‘성지(聖地)’를 개발했다는 게 보스코의 설명. 한국에서도 지금 교구마다 순교자의 사돈네 팔촌까지 끌어대서 성지를 개발하면 신심운동도 일어나고 사회문제에도 눈감고 돈도 벌리고 교구사제 임지도 생기는 삼조일석(三鳥一石) 아니던가?
이탈리아 최북단 바레세 뒷산 도립공원(Parco del Campo dei Fiori) 가파른 산비탈 3km 거리에 장장 15개의 경당과 3개의 개선문을 세웠는데 개선문은 환희, 고통, 영광의 로사리오 현의(玄義)를, 각각의 경당은 각 현의의 다섯 신비를 사람 크기의 성상들로 채워 기도를 하면서 성산을 오르게 해 놓았다. 500년 이상 된 성지다. 기도와 묵상을 하며 각자에게 닥친 팍팍한 삶을 짊어지고서 성모님께 하소연하면서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시름도 풀리겠지.
경당 안에 설치된 조각상 일부
베로니카 앞에서 예수님 쓰신 가시관이 약간 유행을 탄 듯해서…
‘이 사람을 보라!’ 모든 수난사, 지상의 모든 고통에서 인류의 양심에 건네는 빌라도의 말
제네바에서 손주들과 춤추다 무릎이 다친 뒤 다리가 아팠지만 오랜만에 보스코를 걸리는 길이라 참고 걸었다. 아기를 걸음마 시키려면 어미도 걸어야 한다. 산꼭대기에는 정말 자그마한 마을과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산꼭대기 성모 성당’(Santuario della Madonna del Monte)과 수도원과 반시간은 둘러볼 유적들이 있었다. 로코코식 건축과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성당에서는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백발의 사제가 여남은 신자들을 상대로 막 미사를 시작하는 참이었다.
이 마을은 바오로6세와 유난히 인연이 있었다
산위에서 내려다보는 사파세계는 북으로는 알프스 영봉들로부터 남으로는 포강평야(Pianura Padana), 바레세 호수와 라고 마죠레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모든 명당은 절이 차지했듯이 이곳 이탈리아에서도 명당자리는 모두 성당이 차지하고 있다. 인간이란 가장 좋고 아름답고 숭고한 몫은 다 하늘에 바치는가 보다.
8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와 8월 휴가철이라 모든 가게가 닫히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열린 피자집에서 피자 두 판을 사다 저녁 식사를 했다. 중국집 짜장면 대신 이탈리아에서 끼니를 때우기는 역시 피자다.
앞산에서 알프스가 시작하고…
Lago Varese, Vago Maggiore가 내려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