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6일 토요일, 맑음
이탈리아에서는 어느 시골 마을을 가더라도 반드시 ‘전몰용사비(戰歿勇士碑)’가 있고 무명용사를 기리는 묘비가 따로 있다. 이 작은 마을 관자테에도 가족마다 자기 집안에서 1,2차 세계대전에서 전장에 나가 싸우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여 자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치프러스로 기념식수를 한 것이 60여 년 자라있다.
아랫마을에서 성당으로 올라오는 기다란 비탈길(시우가 나서서 하부이랑 세어보니 층계가 125개) 양 옆으로 45개의 하얀 묘비와 치프러스가 하늘 높이 자라 있다. 특이한 점은 층계인데 높이가 15cm 넓이 50cm 정도. 한 칸을 두 걸음으로 걷기엔 좁고, 한 칸씩 듬성듬성 내려가기엔 넓어 대체 왜 이런 넓이로 만들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빵고 신부 말이, 로마 공공건물 등에 흔한 이런 넓이의 계단은 말을 타고 오르던 층계란다. 사람 아닌 말의 보폭에 맞춘 층계란다. 그날에 함께 죽은 말도 기억 하나보다.
“병사 알프레도 고판티를 추모하며 - 1920년 전사”
저녁식사 후에 요즘 몇 차례나 그 층계를 오르내리며 바라보는 노을이 언제나 슬프다. 전장에서든 가까운 데서든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을 우린 어떻게 추억하는가? 죽은 이들에게도 동구 밖에 묘지를 마련하고 날마다 성묘를 하는 이곳 문화와, 머나먼 산골에 묻고 추석에나 기일에 한번 찾아가면 다행인 우리 문화는 추억마저 슬프게 한다.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붉으스름한 언덕, 여기저기
돌무더기도 움직이며, 달빛에
소리만 남은 노래 소리만 엉겨라...
내 넋을 잡아 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김소월. “무덤”에서)
추모비의 염원: “전쟁의 기억이 평화로 끌어가기를!”
어제 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동네 건달들이 휴가에서 돌아왔는지 오토바이 소리, 떠드는 소리로 성당앞 광장이 꽤 시끄러웠다. 이곳 젊은이들은 모여서 놀아도 피자 한판 놓고 맥주 한 병씩 들고 밤새 지껄이며 노는 게 전부란다. 빵기 말이, 어렸을 적에 함께 자란 이탈리아인 친구들을 만나 몇 해 전 어렸을 적 놀던 오스티아 바닷가에서 노는데 참 단순하더란다. 초등학교 때처럼 공 몇 번 툭툭 차고 놀다, 바닷물에 풍덩하고 한 번 몸을 담갔다, 나머지 시간은 끊임없이 지껄이는 게 ‘재밌는 놀이’더란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치열하게 일하고, 놀아도 다시는 그 기회가 안 올 듯이 치열하게 논다. 훨씬 자극이 필요하고 자극적인 놀이문화다. 이탈리아처럼 사회가 안정될수록 매일 노는 게 삶이니까 우리나라 애들처럼 ‘가열차게’ 놀다가는 일 날 거다.
빵기네는 점심 가까이 ‘빨강머리의 마르꼬’를 만나러 코모 호반으로 갔다. 35년 전 초등학교에 함께 다닌 친군데 최근까지 연락이 오갔고, 로마를 떠나 북쪽 끝 코모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해서 딸 하나를 낳았다. 함께 지껄이고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수영장에서 놀다 저녁 일곱 시경 빵기네가 돌아왔다.
우린 점심때 아이아니 부인댁에 초대받아 갔다. 빵고신부가 관자테에 올 적마다 참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분이 아녜세 할머니(88세)다. 다섯 자녀 중 독신인 마씨모라는 둘째아들, 막내딸 라파엘라와 함께 산다. 이 나라에서는 남녀노소 독신으로 사는 일이 매우 흔하다. 마씨모가 직접 마당 화덕에 구워주는 피자를 먹고, 라파엘라는 피자를 나르며 말벗이 되어주고, 아녜세 할머니는 고추기름, 텃밭에서 키운 하바넬로고추, 그리고 일 년 내내 먹으려고 올 여름에 토마토로 만든 파스타 ‘수고’를 챙겨주셨다.
저녁 6시 토요특전미사. 집전과 강론을 빵고신부가 하고, 주임 마우로 신부님은 신자들과 함께 지내는 마지막 주일이어서 공지사항 시간에 이임인사를 했다. 8월 31일에 본당을 비우고, 9월 1일자로 새 임지에 부임하고, 한 달쯤 지나는 9월 24일 주일에 본당을 다시 찾아와 이임미사를 집전하고 송별잔치를 한단다.
빵고신부도 마우로 신부님과 인연이 되어 지난 3년간 (성탄절과 부활절을 포함) 일곱 번째 찾아와 교우들의 다정한 대접을 받아 고맙다고, 특히 금년 여름은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해 주어 고맙다는 작별인사를 했다. 미사 후 많은 교우들로부터 친절한 인사를 받았다.
점심을 잘먹어 저녁은 대충들 차려먹고 큰아들은 ‘며누라기’와 가까운 호텔로 가고, 두 손주는 남아서 할머니를 꼬셔 '자연사 카드놀이'(카드를 펼치면서 동물의 생리와 습성, 생태와 특징을 배운다)를 시작했다. 엄마품을 마다하고 함무이와 남은 속셈도 카드놀이나 타블릿 게임이다. 손주들과 마지막 날인데 뭐가 아깝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