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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사랑받는 지혜’, 인류가 하느님께 십분 발휘해온…
  • 전순란
  • 등록 2017-08-30 10: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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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일요일, 맑음


냉장고에 남아있던 물건을 아직 남은 날들과 맞춰보고서 제네바로 돌아가는 ‘며느라기’에게 싹 싸 보냈다. 과연 몇 끼니를 더 먹고 여기를 떠날까? 우리가 영원히 지상을 떠날 즈음엔 냉장고 속만 아니고 내 가졌던 모든 것, 특히 낡고 볼품없는 이 육체까지 놓고 가야 할 텐데…


몇 달 잡고 여행을 할라치면 처음엔 정말 많은 게 필요할 듯 준비도 철저히 하고 바리바리 싸들고 온다. 그러다 경험이 쌓일수록 봇짐은 작아져 이번에도 많은 것을 놓쳤다. 그렇다고 여행에도 별 지장이 없다. 큰가방 두 개, 작은 기내 가방 두 개를 들고 온 처지여서 큰 가방 하나는 당장 필요치 않은 것들을 챙겨 빵기 차편에 제네바로 보냈다. 이번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과연 여행가방 세 개로 석 달을 살만큼 내 삶이 단순해질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격은 했지만 내 삶엔 아무 변화가 없어 참 딱하다.



시아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노는 일로 지쳤는지 다시 잠이 들었다. 매일 놀기만 하면 ‘노는 것도 일이다’(실업자의 고충을 잘 나타내는 말). 직업으로 놀거나 남을 재미있게 놀게 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 보스코가 여행을 와서도 열 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있는 광경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갈 게다.


시아 엉아는 자고, 함무이는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니까 시우에게 만만할 사람은 하부이. 하부이한테 ‘동물퀴즈’ 카드를 들고 가서 같이 놀자고 조른다. 오가며 보니까 카드놀이 규칙을 수시로, 제 멋대로 바꾼다. 우리 중 하부이가 자기를 젤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약하다는 걸 제법 활용하는 나이다. ‘사랑받는 사람의 지혜’, 인류가 하느님께 십분 발휘해온 지혜다. 그러다 내가 정색을 하고 “성시우!”라고 부르면, 함무이가 하부이의 무서운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네,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부이 맘대로 하세요”란다.




마우로 신부님의 모친과 


빵고 신부가 9시 미사를 드리러 가자 우리도 미사 가자고 시우가 서두른다. 아빠가 호텔에서 돌아오는 시각이 10시 넘어서니 11시 미사에 가자며, ‘너는 엄마를 그리도 좋아하는데 엊저녁 왜 안 따라 갔니?’ 묻자 미사에 가면 할머니들이 예뻐하고, 또 무슨 선물을 주실까 싶어서란다. “그래? 엊저녁 미사에 어느 할머니가 손주가 왜 안 왔냐고 물으시던데… 무슨 선물인가 가져오셨다 그냥 가져가시는 것도 같았고?” 했더니 ‘어느 할머니요?’ ‘확실해요?’라고 따져 묻는다. 나도 아차 하면서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려고 했단다’고 얼버무린다. 조손간의 대화를 듣던 보스코가 너무 큰 소리로 웃어서 둘이 깜짝 놀랐다.


11시 미사에 우리 일곱 식구가 다 참석했다. 정말 행복하고 귀한 자리다. 본당신부님은 ‘12년간 여러분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 잘 지내고 간다며 새로 오시는 신부님께도 나한테만큼 잘 해 드리라’고 이임인사를 하셨다. 빵고 신부도 늘 자기를 환대해 주고 이번 여름엔 수도회에 들어온 지 19년 만에 첨으로 부모님과 긴 시간을 갖게 해 주신 주임신부님과 교우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우리 부부도 이탈리아 북쪽 끝 관자테 본당 전부에 감사할 일이다.



점심은 일곱 식구가 좁은 식탁에서 옹기종기 복닥복닥. 파스타를 좋아하는 시아 때문에 오늘도 스파게티, 생선까스, 줄기콩, 샐러드, 후식으로는 푸딩과 과일을 먹었다.


우리를 끊임없이 행복하게 해주던 두 손주를 데리고 큰아들네가 제네바로 떠났다. 스위스 학교가 내일부터 개학이다. 몽블랑 터널에서 교통체증으로 한 시간은 기다려야겠다면서 큰아들이 엄마 뭐하시느냐 물어왔다. ‘아빠는 글 쓰고 나는 책 본다’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실컷 즐기세요’ ‘응? 그건 요 며칠 간 시우가 저녁마다 너희한테 전화로 날린 멘트였는데?’


역시 이렇게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가면 늘 우리 둘이 남는다. 배 떠난 무인도처럼 편한 마음으로 책을 보며 쉬었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15분마다 울리는 ‘성당 종소리도 꼭 외로워서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닌’ 성싶다.


9월 3일부터 산로렌조 경당 축제를 준비하는…


젖먹이는 성모님과 성라우렌시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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