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일 금요일, 흐리고 비

작은아들이 잡아준 호텔은 알프스 산길을 내려와 트렌토와 가르다로 나뉘는 삼거리에 교통이 아주 편한 곳에 있었다. 밤새 산언덕을 오르내리는 차량 소리에 마치 길가에 텐트를 치고 잔 셈이다. 물론 아침 일찍 차 유리를 고치러 트렌트로 가는 데는 편리하리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리산 산속 고요함에 익숙해진 우리의 귀. 관쟈테 종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도 밤 10시부터 다음 날 7시까지는 조용하다는 묵시적인 약속이 있는데… 자동차는 저 원하는 시간에 지 멋대로 달리니 통제 불능에 약속불능. 우리에게는 대책이 없다.

발가르다(Val Garda)에서 우리가 묵은 여관 뒷산

더구나 보스코가 두드러기가 낫는지 새벽 2시에 일어나 온 몸을 긁어대면서 잠자리에 물것이 있단다. 눈처럼 하얀 새 시트를 ‘이 잡듯’ 뒤져도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 부부 사이에 베를린 장벽을 쌓은 것도 아니니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한 사람만 물린다는 게 이치에 안 맞아 항히스타민제를 찾아서 먹였다.

그렇게 오지 않는 잠을 불러 자려고 애를 썼더니 아침에 일어나서도 눈이 천근이다. “당신은 요술쟁이야, 감쪽같이 나았어!” 새벽잠을 깨워 미안하고 계면쩍어 하는 그를 보니 정말 부부는 마지막까지 함께 해로해야겠구나 싶다. 혼자서라면 저 사람이 저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어떻게 견딜까 싶기도, 비록 치유가 안 되도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혼자 살기로 스스로 결정한 사람들, 수도자와 사제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리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이 ‘등 뒤 손 안 닿는 곳이 결리는데도 파스를 붙일 수가 없어 파스를 방바닥에 놓고서 그 위에 몸을 뉘이었다는 얘기들 듣고는 가슴이 찡했었다. 우리 아들이야 수도회의 동료 형제들이 있으니 서로가 위로와 도움이 되려니…

10시 30분, 관자떼에서 예약해준 카글라스 트렌토 지점을 찾아갔다. 손바닥만 한 유리창이 (옆의 고무 바킹까지 다 갈아야 해서) 비용은 217유로이고 두어 시간 걸린단다. 차라리 큰 유리는 100유로 정도고 30분이면 고친다니…

일단 차를 맡기고 그 두어 시간을 이용해 트렌토 관광을 나섰다. 겨우겨우 티켓을 사서 겨우겨우 버스를 타고 겨우겨우 중심가에 있는 ‘성모대성당’과 ‘카테드랄’을 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12세기에 지어진 산로렌조 성당도 보았다. 성모대성당과 주교좌성당은 16세기(1545-1563)에 ‘트렌토공의회’가 열린 곳이다. 그 회의 덕분에 가톨릭이 여러 개신교 중의 하나로 깨지지 않고 ‘구교’로라도 남았다. 요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어 다시 한 번 그 시대를 돌아보고 싶었다.

트렌토공의회는 휴회를 거듭하며 성 마리아 대성당과 카테드랄 양편을 오가며 열렸다

트렌토를 떠나 알프스로 향하다 점심을 먹는 식당에서 보스코가 화면이 새카맣게 된 핸폰을 내게 내밀며 화면이 사라졌단다. 빵고에게 물어서 해결해보란다. “여보, 아들 그만 찾아요. 내가 화면 찾아 줄게요!” 대책 없는 남편 대신 많은 경우 내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더듬더듬 화면을 찾아 밝기를 조절해주니 그의 얼굴도 밝아진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하지 않나?

발수가나(Val Sugana)의 레비코 호수(Lago Levico)에서

미루의 시아버님 고비오님이 하느님 품에 드셨다. 천수를 누리시고 마지막까지 가족들과 이별의 시간을 가지시고 편히 가셨으니, 아버님도 자식들도 복이 많으신 분들이다. 여행 중이라 우리는 차 안에서 연도와 로사리오를 바쳤다. 빵고 신부가 내일 아침에 연미사를 올리겠다고 했다. 가족들도 모두 주님이 주시는 위로로 그 슬픔을 놓아 보내기 기도한다. 우리가 죽은 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기도 말고 과연 무엇이던가?

오후 4시. 2년 만에 그리운 친구 마리오를 만나고, 그가 마련해준 집에서 짐을 풀었다. 오늘은 피곤하여 쉬고 내일 이레네와 만나기로 했다. 12도의 시원한 날씨에 돌로미티 자락엔 밤이 되자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천둥소리도 쉬지 않는다. 알프스의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