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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주일미사는 하느님의 사양산업
  • 전순란
  • 등록 2017-09-06 10: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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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3일 일요일, 맑음


하루 새에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하루 새에 날씨가 바뀔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있다. 팔래 디 산마르티노(Pale di San Martino) 주봉과 멀리 카테나 디 펠트레(Catena di Feltre) 상봉이 하룻밤 새에 눈을 이고 있어 아연해졌다. 마을 처녀가 깊은 산속에 들어가 길을 잃고 밤새 고생하다 마법사 난쟁이를 만났는데 마법사가 준 검은 염소젖을 한 그릇 얻어먹고는 하룻밤 새 머리가 하얗게 세고 기억과 말을 잃었다는 전설이 이 마을 담벼락에도 그려져 있었다. 그 산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만 사냥꾼이 구해준 처녀는 하얀 염소젖을 한 그릇 얻어먹고 기억을 되찾지만 머리칼은 흰 머리카락 그대로였다는데…


이곳 프리미에로(Fiera di Primiero)를 들어서며 어느 핸가도 9월 초에 낙엽송이 노랗게 물들어 웬 가을이 이리도 이른가 갸우뚱 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어제 밤 산보를 하며 오리털 파카를 입고도 어찌나 춥던지 이제부터 시작하는 겨울을 이곳 주민들은 어찌 보내는지 모르겠다. 그제 우리가 오던 날 마리오는 나에게 인사를 하며 눈물을 보였다. 먼저 보낸 아내 세레나와 내가 친구여서 아내 생각이 나서였다.





스무 해 가까이 지나 새 장가를 들었는데 새 아내까지 이태전 암이라는 판정을 받자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러나?’ 하며 너무도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두 번이나 아내의 병상을 수발하다 혼자 남는 게 두려웠을 게다. 그가 웃으면서 명랑하게 말을 해도 그의 깊은 눈은 늘 불안하고 가을하늘처럼 슬프다. 사랑하고 동거하다 결혼까지는 못 간 라우라도 그의 눈 속에 ‘눈부처’로 남아 있다. 한 여자를 사랑하여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을 지켜가는 이들은 축복받은 이들이다.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김현승, “가을, 그 쓸쓸함에 대하여”에서)




동네 성당 9시 미사에 갔다. 머지않아 모두 성당 바로 뒤 묘석 밑으로 옮겨 누울 노인들만 가득하다. 그래도 아직 이 분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마지막 세대다. 이분들이 끝나면 교회는 어떤 모습을 할까? 낮에 보니 동네에 자전거를 타는 젊은이들도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제법 보이던데 그들에게 교회는 무슨 의미일까? 유럽에서의 주일미사는 하느님의 사양산업을 보는 기분인데 교회 뒤 공동묘지를 돌아볼수록 살아있는 사람들, 살아있는 교회가 그립다.


오늘 미사를 집전한 신부님은 아랫동네 살레시오 수도원 사제. 예전에 기술학교였는데 폐교되고 건물만 남았다. 자기만 젊고 바로 윗분의 나이가 73세란다. 나머지는 모두 80세 전후. 미사가 끝나자마자 급한 걸음으로 이웃 동네로 미사 드리러 가야 한단다. 그러고 보니 수도생활도 하느님의 사양산업이 되었다. 사제 한 사람이 대여섯 성당을 돌며 주일미사를 드린다니 ‘우리에게 하느님이 필요한가?’ ‘하느님께 우리가 필요하셔서 애걸하시는가?’ 하느님 없이 인류는 어디로 치닫고 있는가? 오늘 다시 핵실험을 한 북한의 배짱을 보면서 머지않아 우리 모두 하느님께 버림받나 하는 두려움마저 생긴다.



이번에 와서 아직도 마리오의 아내 이레네를 못 만나서 점심 무렵 산마르티노카스트로짜(San Martino di Castrozza)에서 일하는 그니를 보러 갔다. 큰 수술과 항암치료로 많이 야위었지만 마리오의 정성스런 보살핌으로 좋아졌다고 밝게 웃는다. 점심으로 피자를 먹고 커피 한잔을 하고 눈 쌓인 산마르티노 봉우리들을 보고서 돌아왔다. 정말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이 한 남자의 사랑과 정성과 노후배려를 받으면서 그 삶이 (미루가 우리에게 간간이 대접하는 연꽃차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차가운 공기에는 얼어버리는 파충류처럼 그저 집안에 가만히 머물고 싶다. 하지만 보스코를 걸릴 겸, 저녁을 먹고서 냇물을 따라 프리미에로까지 산보하고 돌아오니 두어 시간 산보길이었다. 보름 가까운 달이 휘영청 알프스 봉우리들을 비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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