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7일, 목요일
사드문제로 고생해온 성주 주민들, 그리고 함께 도왔던 단체들이 얼마나 허탈하고 속상할까, 멀리 있는 나도 이렇게 절망스러운데? 이 주민들의 절망을 잘 알고 있을 문대통령은 어떤 심정일까?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다지만, 자신의 진실을 공공연히 설명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면 얼마나 힘들까? 오늘 종일 마음이 무겁다.
약소국으로 머리와 몸뚱이 하나로 악착 같이 일해서 이뤄놓은 오늘의 경제적 위치가 저런 걸레 같은 미국인의 횡포로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처지라고 느껴져 더욱 속상하다. 우리가 인도처럼,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어디에 매이지 말고 자존심 하나로 당당하게 나가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처음부터 비동맹 입장에 처하지 못했고, 오로지 미국이 저지른 한반도 분단도, 단독정부 수립도, 6·25전쟁도 고스란히 당하기만 했고, 그 뒤로도 전작권 마저 없이 미군의 주둔, 그자들의 조종으로 일어난 5·16군사반란, 5·18 군사반란도 당하기만 하는 처지였으니… 보스코도 밤새 뒤척이는 걸 보니 울분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것 같다.
마리오의 아내 이레네가 쉬는 날이라 점심을 차리고 우리를 초대했다. 첫 아내 세레나의 사촌이고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평생을 뉴욕에서 살아온 에르미니오, 또 이레네의 부친(어머니는 금년초에 돌아가셨다), 이레네가 데리고 온 딸 우르술라도 함께 상에 둘러앉았다.
점심 초대에 가기 전 아랫동네에서 생과자를 사고, 예전(20여 년 전)에 세레나와 둘러보았던 상가도 돌아보며 필요한 물건도 샀다.
에르미니오는 올해 나이 88세. 3년 동안 건강상의 문제로 뉴욕에서 못 왔는데 이번에 와서 산 공기를 마시며 많이 건강해졌단다. 어렸을 적 친구들은 대개 다 먼 길을 떠났고, 친구들의 부인이나 자녀들을 만나는데 그게 너무 슬프단다. 개구쟁이 시절 동무들과 달리던 숲과 골목, 그들이 살던 집들은 그대로 서 있는데 어릴 적 동무들은 ‘피리 부는 아저씨’를 따라 어디론가 떠나버렸으니 늙은 남자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다.
그가 마음속에 묻어 놓는 애잔한 감정을 보스코는 말없이 귀 기울여 준다. 그래선지 둘은 예전부터 퍽 친해서 우리가 여름에 알프스에 오면 산에도 같이 다니곤 했다. 에르미니오가 주로 말을 하지만 인생을 두고 긴 대화를 나누는 벗이 있어 좋아 했다.
어제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auciani: 교황 요한바오로 1세) 박물관에서 들은 얘기. 알비노가 신학교에 간다니까 독일 가서 일을 하던 부친(사회주의자여서 성직자들을 별로 안 좋아했단다)이 “신학교에 가는데 조건이 하나 있다. 신부가 돼서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여라!”는 편지를 부쳐 왔단다. 성당 도서실에 소장된 책은 많이 읽지만 학교 공부는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였고 더구나 품행은 ‘미’나 ‘양’ 정도였다는 성적표도 진열되어 있었다.
교황이 되어 그가 남긴 한 마디는 흐뭇한 미소를 자아낸다. “교황도 한때는 초등 중등 고등 대학생이었답니다. 청춘과 본당만 생각했지요. 아무도 나한테 ‘너는 장차 교황이 될 거야!’라는 말을 안 해줬어요. 아, 누가 그런 말만 해주었더라면, 그런 얘기만 해주었더라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착실히 준비를 했을 텐데…” 카날레다고르도(Canale d’Agordo)가 아예 시청 건물을 내놓아 교황기념 박물관을 만들었으니 그 작은 산골동네가 사제 130명, 주교 4명, 그리고 교황 한 명을 낼만한 텃세다.
알비노의 초딩시절 성적표
점심 후 발디카날(Val di Canal)로 들어가 산마르티노의 뒷모양을 보고 예전에 세레나와 함께 갔던 호수를 보러 갔다. 산비탈에서 내려와 도로를 점유하면서 외양간으로 모여드는 소떼도 보고 계곡에 이르자 비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한 시간 이상 숲속 차 안에서 빗소리를 듣다가(양철지붕 관사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비가 멈추자 말끔히 세수한 뒷산과 나무들의 얼굴을 거울로 비춰 보여주는 호숫가를 거닐었고, 베네토에서 왔다는 카타리나, 프랑코 부부와 풀과 나무, 인생과 가정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