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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도움이신 마리아, 우리 시엄니!’
  • 전순란
  • 등록 2017-09-11 10: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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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0일 일요일, 하루 종일 비


밤새 내린 비에 산도 나무도 지붕들도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있다. 사람들이 테라스의 제라늄이나 가을꽃이 지러 떨어질까 꽃들에게 정성스럽게 우산을 씌워준다. 


9시에 미사가 있어 나선다. 우리 집 옆으로 한두 집 건너면 교회 공동묘지고, 공동묘지 벽은 곧 성당 외벽이다. 죽음과 삶이 이토록 지근거리라니! 언덕 위 크고 작은 목조주택들이, 먼저 떠났거나 이젠 따라갈 사람들을 아직 가슴에 품고 있다. 떠난 이는 추억으로, 병든 이는 돌봄으로, 아직 성한 이들은 생기로 가슴에 품고 있다. 아아, 집이란 게 꼭 산자들만의 처소는 아니다.




성당 안에는 ‘예수님 엄마’ 성화나 성상이 하도 여러 개여서 세 보았더니 앞쪽으로 만도 여섯. 대부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인데, 오늘 제대 앞으로 내어 모신 성모님은 9월 15일이 ‘성모통고축일’이어서 다음 주일에 저분을 모시고 동네를 한 바퀴 행진한단다. 가슴에 칼을 꽂고 인간의 고통스런 현실을 괴로워하시는 표정이라서 우리나라의 급박한 상황을 성모님께 아뢰고 제발 우리 좀 살려주십사 부탁드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이 바로 옆에 있는 바(bar)로 우르르 몰려간다. 그 모습을 내가 쳐다보자 한 아줌마가 겸연쩍은지 나더러 ‘여긴 제2의 성당이라구!’ 한다. 오늘 복음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신 이상 믿는 이들이 함께 모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교를 한다면 성당이든, 다방이든, 맥주집이든 다 거룩하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단서는 붙었지만…




비도 오고 뜨끈한 국물을 먹고 싶어 돼지고기와 호박을 사들고 와서 얼큰한 찌개를 끓였다. 역시 우리 음식은 목구멍을 타고 술술 잘도 넘어간다. 어제 산티아고 800km 절반 좀 넘게 걷고 계신다던 장신부님이 순례길에서 ‘신라면 3.50€, 햇반 4€’ 광고문구를 발견하고 눈이 얼마나 번쩍 뜨였을까! 신라면과 햇반에 와인 한잔의 행복! 엠마오보다 훨씬 먼 길을 가는 우리 순례자 장신부님과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가시기를… 고독한 침상에 몸을 뉘이는 모든 사제들 머리맡에서도 성모님이 바느질로 낮에 헤진 옷을 기워주시기를…



아랫집 할머니가 성당에 안 오셨기에 2층으로 올라오다 들리니 간밤에 비가 내리고 습해선지 할아버지가 밤새 집안을 서성이고 다니셔서 당신도 잠을 못자 TV로 미사를 드리는 중이시란다. 아까 신부님 미사강론에 국민 87%가 가톨릭 신자로 자처하는 이탈리아에서 15%만 성당에 온다고 한탄을 하셨다. 본당사제의 상시체류는 꿈도 못 꾸고 가까운 살레시오 수도원 신부님들이 주일미사를 순회하는 이 골짜기에서, 마을마다 솟아오른 저 종탑과 성당, 그리고 산비탈의 수도원들은 장차 어디다 쓸까 나까지 걱정스럽다.




3시 30분, 메짜노(Mezzano)에 있는 살레시오 학교를 방문했다. 오늘 우리 마을 성당에 오셨던 로베르또 신부님이 그곳 원장이자 교장이셨고 지난주 미사에 오셨던 마놀로 신부님도 우릴 반겨 주셨다. 살레시안들은 어디 가나 친절하고 놀라운 친화력이 있어 처음 만나도 오래 함께한 한 가족과 같다(‘가족 정신’이라고 부른다).


원장신부님은 당신들이 운영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안내해 주셨고, 소성당에서 모셔진 ‘도움이신 마리아’ 성상을 보여주자 보스코가 자기는 중1 때에 엄마를 잃고 저 성모님을 늘 어머니로 모셨노라고 했다. 그럼 내게는 시어머니가 되신다. ‘도움이신 마리아, 우리 시엄니!’ 잔소리 없이 사진액자 속에서 늘 웃고만 계시는 우리 친-시엄니(이런 말 있나?)도, 아기 예수를 안고서 보스코네 4형제를 키워내신 저 시엄니도 보스코를 건사하는 나를 극진히 예뻐하심에 틀림없다.




저녁은 이레네가 퇴근해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피자를 사서 마리오네 집에 가서 함께 먹었다. 일에 지쳐 돌아온 이레네가 언제 저녁을 준비해서 먹을까 걱정하다가, 우리 둘이 와 있어서 더욱 난감했다가, 식탁 위에 놓인 피자를 보고는 안심했다는 듯 활짝 웃었다. 이래서 이탈리아에서 피자는 우리네 짜장면만큼이나 안주인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이다.


비오는 날 산마르티노의 저녁 풍경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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