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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사람은 믿어주는 만큼 사람이 된다”
  • 전순란
  • 등록 2017-09-13 11: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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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1일 월요일, 비오다 맑음


산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구름이 끼나, 변함없이 아름답다. 예쁜 여자는 어떤 의상을 해도, 심지어 누더기를 걸쳐도 아름답듯이… 전나무 숲에서 숨바꼭질 하던 물안개가 산허리를 감고 오르다 바람이 일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가 어느 새 더 많은 친구를 끌고 와서 장난을 친다.


요즘 보면 마리오 얼굴에 어둔 그림자가 두 해 전보다 짙다. 아내의 수술과 치료에 수반된 경제적 압박 때문이려니 하지만 데리고 들어온 딸내미의 철없는 행동거지가 힘들게 하나보다. 자기의 이혼과 재혼이 딸에게 준 상처가 크다고 생각하여 이레네는 딸에게는 모든 걸 허용하고 모든 걸 희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가 아픈 몸인데도 엄마를 몸종처럼 부리는 딸이 마리오에게는 얄미운가 보다. 한 남자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누굴 돌보는 건 아내 하나로도 벅찬데 딸까지 해서 두 여자는 무리다.




아내의 죽음, 라우라와의 동거와 파경, 새 아내의 대수술, 거기다 의붓딸 한없이 착하고 섬세하고 매사에 정확한 남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오늘 이레네가 직장을 쉬는 날이어서 우리를 점심에 초대했으니 나는 가서 점심 준비를 돕고 보스코는 마리오와 깊은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큰마을 프리미에로에 장구경을 갔다가 때마침 마리오도 장보러 나왔기에 보스코와 둘만 남기고 나는 얼른 이레네한테로 갔다.


보스코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장구경이고, 반대로 제일 좋아하는 건 책구경이다. 그런 사람이 마리오가 물건을 고르는데 따라다니고, 세레나 무덤에 놓을 조화도 사다가 무덤에 갖다놓고서, 묘지 옆 공원에서 한 시간이나 얘길 나누었단다. 70 넘은 남자가 어찌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지금처럼 살다가 죽겠다는 열녀춘향이식 얘기에 공감해주는 정도로 얘기가 끝났나보다. 보스코는 누구와 상담한 내용은 내게도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스물한 살 나이에 나는 어땠을까? 이레네는 자기 여동생도 시집가기 전 가사를 전혀 도와준 일이 없어 ‘너는 시집가면 쓰레기장처럼 해놓고 살 게다’라며 엄마가 꾸중을 했는데 시집가서는 너무도 완벽하게 살림을 한다며 자기 딸도 그럴 거라고 자신한다. 그렇다, 엄마라도 딸을 믿어줘야지, 사람은 믿어주는 대로, 믿어주는 만큼 사람이 된다. 나도 처녀 적 엄마의 집안살림을 거든 기억이 거의 없으니까…


점심을 먹고서 40여km 떨어진 펠트레(Feltre)로 구경을 갔다. 로마 시대부터 18세기까지의 건축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구시가지는 중세에 겪은 두 번의 전쟁으로 많이도 망가졌고 사람이 안 사는 것처럼 낡아 있어 우리나라 집장사들이 보면 싹 쓸어버리고 15층짜리 아파트나 짓자고 나설 것이다(로마를 관광 오는 우리나라 중년 아재들이 곧잘 하는 소리).



대광장까지 걸어올라가 베니스 오페라 극장을 지은 델라세나(De la Sena) 극장, 수차례 참담한 전투를 겪은 성벽과 알보이노 성채(Castello di Alboino), 로마 시대 이 지역 전체에 식수를 공급한 수조(水槽)와 분수, 산로코 성당(Chiesa di San Rocco)을 둘러보았다.


광장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어느 젊은 신사가 다가와 그 일대의 역사와 건축, 지하의 발굴 등을 기막히게 설명해준다. 유럽에서 젤 먼저 생긴 파도바 대학을 나온 플라비오라는 고고학자였다! 20여년 닫혀 있던 오페라극장을 재개관하는 전기공사를 감독하는 중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건축공사에 고고학자가 감독을 하면서 역사적 유물이 발굴되면 즉시 개입하여 그 보존과 감정을 위해 공사를 중단시킨다. 어디를 파든 적어도 2500년의 역사가 흔적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로마에 지하철 3호선을 파는데 30년이 걸려서도 아직 끝이 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 같으면 얼른 묻어버리고 공사를 서둘러 끝마치는데…



도시계획으로 저 높이의 바닥을 긁어내 도로를 낮추어 지하의 초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펠트레 축제에 한국인 참가자가 있었나보다 


두오모 방문을 끝으로 펠트레 관광이 끝나고 안주(Anzu)라는 이웃마을 산비탈에 자리잡은 성지(Santuario di Ss. Vittore e Corona)로 순례를 갔다. 11세기부터 성당을 짓고 팔레스티나 성지에서 두 순교자 유해를 모셔와 안치하고 지오토풍의 벽화를 가득 채운 문화재이자 피정의 집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딜 가도 한나절 둘러볼 역사, 적어도 1000년 넘은 문화재가 있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나라다.


Santuario di Ss. Vittore e Corona



지하 크립타 아닌 제대 중앙을 순교자 무덤(Martirium)이 차지하는 것은 동방 양식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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