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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사람은 땅을 닮고 땅은 지세대로 사람을 키워낸다
  • 전순란
  • 등록 2017-09-18 10:35:53
  • 수정 2017-09-18 13: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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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5일 금요일, 흐리다 움부리아는 소나기


아래층 할머니가 할아버지 정기 검진 땜에 고향을 다녀왔다며 당신이 올 봄에 딴 체리로 담그신 그라파를 한 병 주신다. 혹시 우리가 가버리고 없을까봐 걱정했다며 수줍게 내미는 할머니 손을 꼭 잡았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할머니 손이 장작개비 같았다. 우리가 간다니까 어제 우리를 찾아왔던, 이레네의 동생 마리안젤라의 손도 꼭 같았다.


젊으나 늙으나 동서양 다 산속의 삶은 마찬가지여서 몸뚱이가 부서져라 일을 해도 별로 티가 안나고 고달프기만 하다. 더구나 여자들의 삶은… 그래서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지만 도시의 삶 역시 뿌리 뽑힌 나무 같아서 농촌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빌려 입은 옷 같아 편안치가 않다. 할머니는 그라파 한잔을 하거든 당신을 기억하여 아베마리아(성모송) 한번만 바쳐달라신다.


프리미에로 계곡


발수가나계곡


포강 평원


움브리아 언덕 


나는 인사동에서 산, 수놓은 코사지를 가슴에 달아 드리고 할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그분이 가까이에서 말을 건네고, 인사차 서로 뺨을 비빈 최초의 동양 여자가 나일 게다. 아이처럼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남편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음이 느껴진다. 하느님이 허락하셔서 아직 이 땅에 살아있다면 이태 후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8시30분엔 마리오와 이레네가 작별인사차 숙소로 왔다. 이레네는 윗동네 산마르티노 주말 근무차 가게로 출근하고, 마리오만 남아 미처 못 했던 속 얘기를 마저 했다. ‘내 아이와, 당신 아이가 우리 아이를 괴롭혀요’라는 말을 옛날엔 농담으로 했는데 이제는 그 말이 사실이더란다. 재혼의 경우, 데리고 온 자녀 문제로 재혼한 당사자가 몹시 고생하는 경우들을 보아왔다. 마리오도 그 문제로 속을 태우고, 오죽하면 의붓딸의 대모이자 이모인 마리안젤라가 ‘문제가 심각해지면 자기가 개입하여 해결할 테니 마음 놓으라’는 말까지 우리한테 하겠는가?


떠나는 나를 안고 인사하며 눈물을 비치는 마리오를 두고는 마리오의 큰아들(빵고의 유치원친구) 만리오 어릴 적이 생각났다. 엄마가 나에게 저를 맡기고 시내 갔다가 늦도록 안 돌아오면, 잘 놀다가도 테라스에 나가 지나는 차들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이든 모습이 겹쳐진다. 보스코에게도 나는 내 이름 그대로 ‘맘마’ 말가리타다.


장혜숙 선생이 사는 페루지아 산죠반니판타노



우리는 정든 프리미에로 골짜기를 떠나 발레 델 바노이(Valle del Vanoi) 협곡을 지나고, 트렌토에서 파도바에 이르는 발수가나(Valsugana)를 국도로 달리고, 거기서 고속도로를 타고 볼로냐(Bologna)까지, 다시 체세나(Cesena)까지 가서 ‘슈퍼스트라다’(자동타전용도로)를 탔다. 80년대에 베니스 갈 적마다 달리던 길이다. ‘없는 성세’에 비싼 고속도로 비도 절약하여 즐겨 달리던 길이다.


한가한 길이지만, 도로면은 흥부네 이불자락처럼 안 기운 데가 없을 정도로 가난에 절어 있는 도로다. 게다가 예고된 돌풍날씨가 소나기로 쏟아지니 노면에 고인 물이 2m씩 튀어 올라 피할 수도 없고, 누더기로 기운 아스콘은 사정없이 차체를 흔들고, 공업지역 간에 물건을 실어 나르는 대형트럭들과 나란히 앞도 안 보이는 폭우 속에 산길을 달리는 일은 끔찍했다. 그러나 국지성 소나기여서 해가 반짝 나기도 했다.


알토 아디제의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뒤로 북쪽 사람들이 곧은 기개를 가진 산봉우리 같다면, 포강평야의 광활하게 펼쳐진 들녘의 에밀리아로마냐 사람들은 부지런히 땅과 기술을 가꾸고, 움부리아와 토스카나의 매끄러운 구릉지역에서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이 태어난다. 사람은 땅을 닮고 땅은 지세대로 사람을 키워낸다.


우리는 페루지아 전원시인 아르만도 알룬니(Armando Alunni) 선생님과 결혼한 장혜숙 선생을 보러오는 길이다. 35세나 터울이 진 남편이 몇 해 전 돌아가시고, 서정시인 아르만도의 시문과 자기의 미술작품으로 ‘알룬니 박물관’을 준비하는 중이어 그 과정을 보러오는 길이다.


장선생님은 남편이 돌아가신 후 그 분의 시세계와 본인의 그림세계가 둘이서 살아온 저택과 정원에서 박물관으로 남기를 추진 중이다. 오늘 페루지아 시장이 직접 방문하고 갔다니 한국여성의 강인한 의지가 이 뜨락에서 예술사의 기념으로 꽃피기를 기원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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