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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너무 가난해서 나눌 것이 많은 사람들
  • 전순란
  • 등록 2017-09-20 12:19:06
  • 수정 2017-09-20 15: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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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9일 화요일, 맑음 


밤새 하늘을 뒤흔들며 소나기가 오다 멈추다를 되풀이했다. 이곳에서는 비도 사람들을 닮아 소란하다. 앞서 가는 차의 운전자가 차창 밖으로 손을 길게 내밀고서 옆 사람과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도 흔들어 대서 행여 사고가 날까 걱정됐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얘기를 하며 전신을 움직이고, 손을 얼마나 흔드는지 모른다. 두 손을 붙잡아 묶으면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된단다, 흔들 손이 없어서.


분도수도원에서 식사를 하면 침묵을 하는 엄숙함 때문에 위장이 묵직하기만 한데, 같은 나라에서 창설된 살레시오수도회는 식사시간이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장바닥 같다. 한창 자라는 장난꾸러기 청소년들에게 만약 통째로 입을 다물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새벽 미사에는 철학과 1학년까지 오고 나서 분위기가 활발하다.



저녁나절 카타콤바 풀밭에 모인 갈매기떼 




식사시간에 전임총장 챠베스 신부님 식탁에 앉았다. 우리나라 회원들에 대한 그분의 신뢰와 기대는 대단했다. 물론 우리 앞이니까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 같지만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 있는 다른 장상들에게서도 같은 칭찬을 자꾸 들으니까 과연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진다. 그제 멕시코에서 돌아온 챠베스 신부님은 모레는 인도 캘커타로 떠나신단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루이지 신부님은 한눈을 찡긋하면서 “총장님은 와이셔츠 빨아 입으러 잠깐씩 우리 집에 들르시죠?” 라니까 “빨 시간도 없고 그냥 갈아만 입으러 오는 편”이라고 대꾸하신다. 


우리 아들이 살레시오회에 들어오자마자 대상포진이 걸렸다면, 저렇게 숨 쉴 사이도 없는 어른은 무슨 병에 걸릴까? 살레시안은 젊어서도 죽고 늙어서도 죽지만 병명은 언제나 하나란다. “과로사!”





9시에 바티칸 옆 아우구스티니아눔(Augustinianum)으로 ‘공부하러 가는’ 보스코를 ‘등교시키러’ 갔다. 안식년(1997~1998)을 지내러 로마에 와서 산칼리스토 카타콤바에서 바티칸까지의 길은 아마도 서울에서보다 더 많이 달린 길이다.


바티칸 옆 아우구스티노회 총본부에 차를 세우고, 보스코는 노트북을 들고 도서관으로 들어가고 나는 성베드로대성당 광장 카롤로 마뇨 회랑에서 한국 천주교의 230년 역사를 조명하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전시회장을 둘러보았다. 전시장을 지키는 순교복자회 박엘리사벳 수녀님도 만났다.


모처럼 혼자가 되어 에우르 쪽에 있는 바오로 사도 순교지 트레폰타네(Tre Fontane)와 트라피스트 수도회 성당을 찾아보았다. 수도 없이 많이 왔던 곳이다. 오스티아에 살 때는 샘물을 뜨러 자주 들렀고, 윗편에는 ‘예수의 작은자매회’ 총원이 있어 걸핏하면 한국수녀님들을 만나러 가서 밥을 얻어먹곤 했다. 손님 대접이 각별하여 소박한 음식이지만 끼니 때면 함께 있는 모두와 나누어 먹는 곳이다. 수도회 총원이지만 건물은 난문수용소 수준이고, 워낙 가난해서 나눌 것이 많은 수녀님들이다.





총회가 있어 최고평의원으로 계신 인자수녀님, 한국대표로 오신 영희 수녀님, 캄보디아에 가계신 경자수녀님도 만나 재미있던 옛날 얘기를 신나게 나누었다. 그러다 한반도 핵긴장에 얘기가 머물자 모두 얼굴이 어두워진다.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나라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국지사다.


저녁 7시에 아칠리아에 사시는 김대사님 부부가 저녁을 대접하겠다며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만날 때마다 우리가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외교관으로 가진 경험과 감회를 나누다 보면 그분의 성실함이 돋보여 문대통령이 정통 외교 공무원보다 정통 아닌 사람들을 발탁해 쓰려하는 마음을 알겠다. 


밤 11시가 넘어 카타콤바로 돌아와 걷는 치프러스 길… ‘자정 가까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공동묘지(카타콤바)를 배회하는 두 남녀가 있었으니…’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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