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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하느님 모상들인데 어련하랴만 역시 모든 만남은 은총이다
  • 전순란
  • 등록 2017-10-02 12: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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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30일 토요일, 맑음


어제 일기를 바르샤바 공항 라운지에서 썼다. 일기를 쓰기는 했는데 올리는 일이 문제였다. 세계 여러 공항을 다녀도 우리 인천공항만큼 여러 면으로 편리한 데가 없다. 쇼팽공항의 와이파이로 글을 올리려고 한참 고생하다가 라운지 앞 의자에 앉은 한국인 청년에게 ‘멜을 보내야 하는데 안 올라가니 좀 도와줄 수 있느냐’ 물었다. 우리나라 공항만 최고가 아니고 우리나라 총각도 최고다. 친절하게 자기 핸드폰을 테더링 해주고 보딩을 미루면서까지 도움을 주었다. 겨우겨우 편집해 올리고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창문으로 떠오르던 아침해 



이번 여행 중에 많은 사람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역시 모든 만남은 은총이다! 역시 세상엔 나쁜 사람들(차유리를 깨고, 소매치기를 하고)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하느님의 모상들인데 어련하랴만… 비행기에서 자다가 졸다가 하면서 그 다정한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인연의 사슬로 엮어져 세월이 쌓일수록 곰삭는 우정이 참 고맙고도 귀하다. 


잠은 거의 들지 못했고 보스코도 좌석의 전원에 연결하여 노트북을 켜고 이번 로마에서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래도 우리 같은 숏다리는 견딜 만하지만 저 롱다리의 서양인들과 우리 청년들은 복도로 무릎이 튀어나올 정도이니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보스코가 키 작아 덕을 보는 경우는 지난밤처럼 비행기 이코노미석에서도 견딜만하다는 경우와 허리디스크가 없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머리 위 짐칸이 유난히 높아 말만한 폴란드인 스튜어디스가 열어줘야 했을 땐 약간 창피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나이 들수록 장시간 비행여행이 힘들어지는데 우리 아들은 한 해 거의 절반을 비행기에서 보내야 하니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걔가 대학을 다니고 있을 적에 내 친구 남편이 주역으로 빵기 사주를 보더니만 ‘역마직성이라 비행기 어지간히 타겠구먼’이라는 팔자를 예고하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는 밤새 강의 준비를 하고 새벽 두세 시에 한숨 자고는 낮에는 강의와 회합과 교육으로 하루를 보내고…





편서풍을 타선지 우리 비행기는 30분이나 빨리 도착했다. ‘고마운 이엘리’가 벌써 나와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차는 길고 넓어 짐 싣는 데나 동네 아줌마들 동원하는 데나 매우 유용하단다. 저런 차를 지녔다고 누구나 저런 마음을 갖는 건 아니다. 그녀만의 활달하고 고운 마음이 사람들을 모아들인다. 더구나 오랜만에 와서 우리 집에 김치가 없을 거라면서 추석 지낼 김치를 골고루 싸 왔다. 


그니 옆에 앉아 비몽사몽 내 눈이 반쯤 풀리고 혀가 굳어 말이 어눌하게 들렸던지 밥 먼저 먹고 어여 자라면서 4·19탑 앞의 ‘꽁보리밥 신정’으로 데려갔다. 날 보러 오던 엄엘리도 꽁보리밥집으로 불러들였다. 우리에게 점심을 사 먹이고 우리 집에 짐을 내려주고서는 이엘리는 마루 청소까지 해주고서 갔다.


그런데… 내 보호자 엘리가 가고 나서 잠시 쉬려고 자리에 누웠다 내 망가진 핸폰, 내 망가진 자동차(에어컨이 작동 않고 엔진오일이 바닥났다)이 생각나자 졸음이 싹 달아났다. 오늘 중으로 못 고치면 추석연휴 열흘을 고생하리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우선 삼성 AS에 가서 핸폰을 고쳤다. 서비스 기사가 마침 자기 낡은 핸폰에서 부속을 꺼내서 전화와 음성기능이 고장난 것을 공짜로 즉석에서 고쳐주었다. 


자동차 세차를 한 다음 카센타에 갖다 주니 두어 시간 후에 고쳐서 집으로 끌어다주었다. 갑자기 애국자로 돌아와 ‘우리나라 좋은나라!’를 외치고서 생각하니까 젊은이들에게 저런 후다닥 봉사를 시키면서 조이고 조이는 업주들이 생각나자 가슴이 아연해진다.


과연 두 달 반 만에 만나본 우리집 총각 정현이 입이 다 터졌다. 무슨 연극 대본을 그리고 만들다 하다 보니 일주일 넘게 잠을 못자서 그렇단다. 걔 말로는 요즘 대부분 젊은이들의 삶이 이렇게 쫓기는데 주택마련은커녕 최소한의 인간 대접이라도 받는 애들이 자기 주변에선 보기 드물단다. 얼마 전 영국에서 온 젊은 연극인들과 함께 일한 적 있는데, 걔들은 일의 강도도 낮고 재미있게 놀면서도 그 일을 여유 있게 해내더란다. 그렇게 일하고서도 사는 것, 먹는 것 문제가 없는 게 참 부럽더란다. ‘너는 뭐가 문제인 것 같으냐?’니까 ‘부의 불평등으로 가진 자는 무지막지하게 많이 차지하고 그 나머지 재화를 온 국민이 나누다보니 그렇다’는 정답이 청년예술가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의 스위스 여행을 반가이 맞아준 소피 부부가 보내온 오늘 사진. 벌써 알프스가 그립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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