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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30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10-27 10: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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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독서(탈출 22,20-26) 해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신다>


계약의 법전(20,22-23,33)에 속하는 이 부분은 분명히 이집트에서 탈출한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은 단지 회상하고 기념하는 역사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교훈이 되었다.


20절에서 말하는 ‘이방인’이란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집트에서 외국인으로서 살았고(23,9), 모세도 미디안족 가운데서 외국인이었으며(2,22,18,3), 레위인들도 자기네 땅이 없어 똑같은 처지에 있었다(유딧 17,7-19; 신명12,12). 일반적으로 외국인은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했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노예생활을 시키지 말라고 한다.


‘과부와 고아’들도 보호자가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불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기 쉽다. 예언서들과 신명기에서는 늘 그들을 염려한다(신명 10,18; 14,29; 24,17-21; 이사 1,17.23; 예레 7,6). 과부와 고아 같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24절). 하느님의 눈에는 의지할 데 없거나 버림받은 고아・과부・창녀・장애자・정신병자 같은 사람들도 나와 내 아내・자식과 똑같이 소중하고 귀중하다. 그들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나와 내 가족을 버리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 부르짖는 가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 가진 것 없어 살기가 팍팍하고 간신히 목숨을 지탱해가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하루에도 수만 명씩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는 만큼, 하느님께서 나와 내 가족을 당신 마음에 들어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넉넉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가 당신께 더 애절하시다


시편(17) 해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이 시편은 고뇌하면서도 희망에 찬 부르짖음이다. 절망스런 상황이 올바른 사람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자기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할 좋은 기회가 된다.


하느님만이 피난처, 바위, 방패이시고 유일한 해방자이심을 버림받은 사람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무능하고 가난하고 병신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어느 누구 못지않게 귀하게 여기신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학대하거나 노예처럼 부리거나나 착취하는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이상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을 모른 체 하면서 자기네만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제2독서(1테살 1,5ㄷ-10) 해설

<여러분은 우리뿐 아니라, 주님까지 본받았습니다>


바오로가 설파한 복음은 믿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들을 강력하게 해주고, 복음에 순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실상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었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일하시어 승리를 드러내셨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1,6) 말씀을 받아들인다함은 말씀을 믿는 것을 뜻하고, 믿음은 성령의 활동을 전제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많은 곤경과 희생을 무릅쓰고 도전적인 복음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선교사들과 주님을 본받았다고 칭찬받는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생활을 한다는 소식은 인근 지방의 신자들에게 큰 모범이 되었다. 명실상부한 신자 생활은 언제나 서로에게 큰 영향을 준다.


테살로니카 신자들과 초대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사건이 되게 하며,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그분의 다시 오심이 항상 다가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개시이고 서막이며, 종말론적 사건 전반의 서곡이다(4,15이하; 5.1이하).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열렬히 고대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출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여 삶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자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


복음(마태 22,34-40) 해설

<하느님을 사랑하기와 사람을 사랑하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표로 한 율법교사가 나서서 예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유다인 세계에서는 율법의 중요한 정도와 서열을 따지는 논의가 활발했었다. 종합적인 지침의 필요성을 예언자들도 강조하였고(참조. 미가 6,8), 지혜 문학에도 드러나 있다(참조. 집회 12,13).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율법들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이 확실하게 수립되어 있지 못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 답변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 중요성과 독창성이 있다. 예수님의 ‘요약하는’ 답변은 단순히 법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응과 그 순응에 뒤따르는 이웃(사람)에 대한 전적인 섬김과 몸 바침을 가리킨다. 하느님 사랑하기와 사람 사랑하기가 직결되는 것은 단순히 강제규범으로서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선 사람 본연의 자세와 취해야 할 길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가장 높은 거룩한 뜻을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사람이며, 사람관계이며, 사회이며, 과거의 역사이며, 현재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일 뿐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보여주고 당신이 어떤 분신지를 보여주시는 곳은 그 장소뿐이다. 사람은 역사 현실 속에서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을 섬김으로써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귀중히 여기고 애지중지하고 당신 자녀로 삼기로 작정하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는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사람들은 서로 정을 나누는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자기들 사이에 살아가심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묵상


사랑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기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모범적인 생애는 그치지 않고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 빛은 인류의 무디어지고 잠들어 있는 양심을 채찍질한다. 그의 선(善)함은 어떤 특정한 신념에 사로잡힌 데서 비롯되지 않고, 구원사업에 적극 참여함에서 우러난다. 그가 선량함은 선량한 이웃인 까닭이다. 그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곧 예수님이셨다.


누구를 이웃이라 하는가? 자기를 좋아하고 호감을 가져주는 눈에 보이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몇몇 사람인가? 길모퉁이에 버려진 거지도 나의 이웃인가? 유다인, 이방인, 백인, 흑인, 서양사람, 동양사람, 우리나라 사람이라 해서 나의 이웃인가? 아니다! ‘사람’이 나의 이웃이다. 사람이라면 빼지 않고 모두 나의 이웃이다.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사람의 정, 인정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그 필요를 서로 채워주어야 할 이웃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누구인지 신학적인 정의를 내리시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지적하신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착함의 내용은 무엇인가? 사람을 사람이기 때문에 정이 가는 마음씨가 그 내용일 것이다. 인종, 국적, 종교라는 부수적이고 외형적인 모든 요소와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의 처지와 상황이 그 안에 가득 찬 마음씨가 그 내용일 것이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유능한 사람, 무능한 사람, 성한 사람, 병든 사람, 병신, 정신병자, 고독한 사람, 어린이, 고아, 과부, 노인, 못 배운 사람, 전과자, 폭력배, 도둑, 창녀, 그중에서도 천덕꾸러기들, 억눌리는 사람들, 빼앗기는 사람들,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볼 줄 알고, 그들을 보고 어찌할 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해결책을 궁리하고 실천하는 마음씨가 그 내용일 것이다.


비극의 참 근원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 재물욕과 권력욕의 수단과 물건으로 취급하는 데 있다. 우리는 너무도 안이하게 외적인 요소를 따져 자기에게 유리한 점을 가려서 사람을 대우한다. 부자나 권력자를 선망하고 어쩐지 모르게 그들 앞에서 비굴해지는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또 자기보다 못나고 없고 한심한 사람에게는 말투와 인사를 조금 가볍게 하고도 괜찮게 생각한다. 술집 여자는 돈 때문에 굴러다니는 처지니까 돈만 있으면 한번쯤 향락의 대상으로 삼아도 별로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


비극의 근원은 외적으로 인정 없는 소수의 부자들이 자기들만 세상답게 살자고 지지리 못나고 가진 것 없는 무지렁이 같은 놈들이야 자기네 호화판 생활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해서 상납이나 하라는 태도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도구나 물건을 취급하는 태도에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따져서, 그 소수의 인정 없는 불의한 부자들이야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회개를 못하고 있으니까 제쳐두고라도, 인류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사람으로서 자존심에 충분하게 눈뜨지 못하고 있다는 데 비극의 초점이 있다. 기회와 능력이 닿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하루빨리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특권층의 부류에 끼고 싶다는 생각들을 품고 있으면 큰 탈이다. 성급하게 부자들을 본뜨고 싶어서 안달이면 큰 탈이다. 본뜨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본떠지는 것도 아니고, 본뜰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좋은 것이 못된다. 어차피 수탈당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은 따로 처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요는 허욕을 부리지 말고 가난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사람존중심을 기르고 피를 흘려서라도 지키기로 서로 다짐하면서 한데 뭉쳐 당하지 않고 자립하는 큰 힘과 세력을 길러가야 한다. 그 힘으로 인정 없는 소수 특권층을 깨우쳐 돌아서게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사랑하는 착한 이웃이 할 일이다. 차가운 사람들을 따뜻한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그런 착한 이웃이 할 일이다. 



연중 제 30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탈출 22,20-26)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신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시편(17)

저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제2독서(1테살 1,5ㄷ-10)

<여러분은 우리뿐 아니라, 주님까지 본받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울려 퍼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마태 22,34-40)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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