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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한 손으로 물레질 하고 다른 손으로 실을 잣는’ 성서 양처
  • 전순란
  • 등록 2017-11-20 10: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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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맑음


새벽미사를 하러 공소에 내려가는데 정말 춥다. 밭에 뽑다 남긴 무와 배추 잎들이 꽁꽁 얼어 볼품없이 늘어져 있다. 이장댁은 ‘살짝 얼었다 녹았다 하면 무나 배추 둘 다 달아지지만, 까딱 잘못 해 완전히 얼어버리면 김장은 조진다. 제발 나 따라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농사라면 이 동네에서 가장 훌륭한 농부가 이장이고, 부인은 부지런하기가 개미나 꿀벌 수준이기에 내가 자기를 눈여겨보고 따라하는 걸 알아챘나보다.


공소 오는 사람들 입에서 뿜어나오는 하얀 입김이 틀림없는 겨울이라 일러준다. 양파 심기도 끝이 났고 추수도 끝났으니 김장만하면 아줌마들은 동면에 들어간다. 더 이상 집에들 있지 않고 마을회관에 모여, 면에서 대주는 난방비로 얼굴이 벌게지도록 온몸을 굽고, 집에 가서는 전기장판 위에 이불 폭 쓰고 한소끔 자고는 다시 마을회관으로 출근들 한다.




나이 든 분들은 아예 마을회관에서  저녁 식사 끝나고 8시부터 초저녁잠에 빠진다. 혼자서 들어오는 집 처마에 반기는 강아지 새끼 한 마리 없는 시골집들… 문하마을은 ‘마을 논’에서 나온 쌀로 겨울을 나고, 집집의 자손들이 엄니한테 들렸다 회관에 들이밀고 간 멸치상자, 밀가루 푸대, 계란, 심지어 밀감상자에 ‘까자(과자)’까지 먹을 것이 넘친다. 어쩌다 내가 들르면 회관 귀한 음식들을 다 내놓는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 그런데 첫째 독서를 듣다가 보스코와 마주 보면서 ‘킥’하고 웃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양모와 아마를 구해다가 제 손으로 즐거이 일한다. 한손으로는 물레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나는 속으로 ‘(성서의) 이 남자 뭐야? 기둥서방?’ 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안 읽혔지만 아내를 두고 “집안일을 두루 보살피고 놀고먹는 일이 없다”라는 가시 돋친 구절 때문에 “그 남편은 성문에서 지방원로들과 함께 앉을 때 존경을 받는다”라는 잠언(잠언 31,23.27) 구절은 자칫 여자들한테 ‘놀고먹는 남자’(놈팽이)를 연상시킨다. 나중에 보스코더러 왜 웃었나 물으니 “이거, 마누라 등쳐먹는 꼴이 꼭 나잖아?” 했단다.



한나절 벽난로 굴뚝청소를 하고, 장작을 실어 날라 난로에 불을 지피고, 어제 캔 무로 동치미를 담그고, 배추로는 겉절이를 하고, 창마다 문풍지를 달고 유리엔 비닐 뽁뽁이를 붙였다. 


방방 뛰면서 그야말로 ‘한 손으로는 물레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 내 모습이 성서 저자(필시 남자)가 그토록 요망하거나 칭송하는 ‘현모양처’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대담집 ‘주님의 기도’ 막바지 작업을 하느라 정신없는 보스코는 이런 나를 보고 “너의 집 안방에 있는 너의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도다”라는 시편 구절을 태평하게 연상하며 흐뭇해하지 않을까?



날이 어두워졌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는 전순란의 좌우명에 따라(보스코는 ‘내일 할 수 있는 일, 절대 오늘 하지 않는다’는 원칙), 창문에 문풍지 달기 작업을 마저 했다. 보다 못해 보스코가 조수(‘시다’)로 나섰다.


내 어릴 적 겨울이 올 때마다 엄마는 창호지를 접고 가위로 자르고 풀을 쒀 발라 문마다 창마다 문풍지를 붙이셨다. 요새는 철물점에서 찍찍이를 사다 붙이는 작업이어서 훨씬 간편하지만, 어려서 엄마를 도와 문풍지에 풀칠하던 작업이 바로 내 숙명이 되었나 보다. 




“강남의 아파트로 시집을 갔더라면 내 숙명이 바뀌었을까?”라는 혼잣말에 보스코가 초를 친다. “끝까지 해치우는 당신 성격상, 땅 투기에 주식투자에 몰두하다 아마 쫄딱 망해 달동네 쪽방에서 오늘도 문풍지를 붙이고 있을지 누가 알아?” 그게 내 숙명이었다면 지금처럼 차라리 휴천재에 문풍지 붙이는 편을 택하겠다, 전직 대사 남편을 조수로 부리면서…




신부님이 아침 미사 강론 서두에, 부모님 댁에 들르면 온 집안이 썰렁한데 전기장판 하나 켜 놓고 두 분이 달랑 그 위에 앉아계셔서 ‘불 좀 따숩게 때고 살지 웬 청승이오?’ 하고 핀잔을 드렸단다. 그런데 당신도 안식년으로 음정마을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또 당신 돈으로 기름을 넣느라 아끼다보니, 그래서 전기장판만 하나 켜놓고 그 위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니, 부모님의 그 청승 그대로더라면서 웃으셨다.


안식년을 이 산골로 오셔서 주일마다 우리 공소신자들에게 미사를 집전해 주시는 신부님이 고맙다. 미사 후 신부님도 모시고 스.선생 부부와 토마스와 함께 집으로 올라와 아침을 먹었다. 역시 식구가 많으면 밥상은 즐겁고 밥맛은 곱절로 좋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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