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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휴천재 김장하는 날
  • 전순란
  • 등록 2017-12-01 16:31:57
  • 수정 2017-12-01 16:5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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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9일 수요일, 흐림



내일은 날씨가 추워진다고, 배추 얼기 전에 어여 김장하라고, 새벽부터 우리 식당문을 기웃거리며 드물댁이 애가 탄다. 농사 잘 지어 놓았는데 무가 얼 텐데도 뽑지를 않아 어제는 자기가 직접 와서 뽑아다 놓았고, 무청은 우리 정자에 얌전히 널어놓았다. 나야 이번 주일에 다시 서울 갔다 와서 12월 초순에나 김장을 할까 했는데 아줌마 성화에 아침도 안 먹고 팔을 걷어붙였다.


그때 바로 미루가 나타났다. 지난번 가져간 배추와 무로 담근 김치를 맛보여 주려는 귀요미의 등장으로(일본 다녀온 앙증맞은 선물도 가져왔다) 우선 아침을 먹을 수 있었고, 텃밭에 배추가 남으니 한 열 포기 가져다 내 손으로 김장을 해보라고, 매해 서너 곳에서 김장김치를 선물받는다지만 내가 직접 한 김장이 바로 내 손맛이라고 꼬셨다. 미루는 워낙 눈설매가 있고 손맛이 있어 올해는 만난 김치를 담글 게다. 텃밭으로 내려가 아줌마가 가져갈 양의 배추를 정해주고 우리 몫에서 오늘 김장할 배추는 뽑았다. 워낙 잘돼서 포기가 엄청 무겁다.



보스코는 다듬어 놓은 배추를 우물가로 실어나르고 나는 갓을 땄다. 몇 년 전 갓 씨 한 봉지를 뿌려 놓았더니 자라고 씨맺고 떨어져 또 나고를 거듭하여 동네 아짐들이 김장철이면 우리 갓에 관심이 많다.


연수씨가 일하는 곳에 주차를 돕는 늙은 총각이 있다. 스님이 되려고 마음공부를 해오다가 드디어 입산하려고 마음먹고 절에 가는 길에 차가 굴러 죽음의 문턱까지 갔단다. 죽음을 체험한 후 ‘중 되는 일도 일종의 허영’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주어진 평범한 삶을 살아간단다. 그런데 그의 계산법이 아주 독특하다. ‘주차비를 받아(함양읍내 주차비는 차 한대 500원) 다 가지라’니까 자기는 고용된 몸이니 절반만 받겠다며 굳이 절반을 내놓는단다. 


어느 날 모든 계산이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차 한 대가 들어오더란다. 500원을 받아 든 이 처사님, 오백 원짜리를 들고 한참 들여다보더니 "50원 짜리가 없는데 200원만 받으실래요?" 하더란다. 절반을 연수씨에게 내놓아야 하는데 300원과 200원 사이에 고민이 컸을 게다.


그가 노동하는 목표는 뚜렷하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올 만큼만 벌겠단다. 그러니 성지순례의 노자에 50원이 더 붙었다! 우리 눈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게 기인인데 인생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기에 연수씨는 그를 존경한다.


드물댁은 오전에도 찾아와서 파도 다듬고 생강도 까며 날 도와주려고 애쓴다. 다만 ‘살림을 제대로 안 해봐서 김장하는 건 못 도와준다’며 돌아간다. 그렇다. 주변에 이 나이 되도록 김장 한번 안 해본 사람도 꽤 된다. 바끄네도 그렇겠지? ‘유쾌한 정숙씨’는 안 그럴 게다. 자기 손으로 씨 뿌리고 길러낸 배추와 무로 김장하는 건 더 특별한 특권이고...


오랜만에 소담정이 찾아왔다. 오랜 감기로 많이 수척해 있다. 시골에서는 아프면 안 되지만 혼자 사는 사람은 아프면 더 안 된다. 내 팔이 아파 통증클리닉에 갔더니 근육에 무슨 주사를 한 대 놔주어 씻은 듯이 통증이 가셔서 되레 무섭다니까 스테로이드계 주사일 거란다. 한의원이고 양의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스테로이드를 쓴다며 아플 만큼 아프면서 내 스스로 이겨내야지 병원의 주사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충고.




오후에 무와 배추를 씻어 배추는 커다란 비닐봉지에 소금물과 함께 넣어 절였다. 함지에 담그고 때때로 뒤집어 주던 일이 비닐봉지만 이리저리 뒤집는 간편한 작업으로 바뀌었다. 양념꺼리와 마늘 생강을 씻어서 썰고 갈았다. 무를 채썰고(오른팔이 아프다니 보스코가 무를 채칼에 밀어주었다) 고추가루로 버무리고 부엌과 식당을 정리하고 나니 11시가 넘었다. 


김장하는 날 집안에 가득 배는 양념냄새! 동태 살은 김치에 넣고 내장과 알로 엄마가 끓여주시던 찌개 냄새가 갑자기 그리워진다. 엄마의 젊음과 생기 넘치던 모습이 그 냄새로 그려진다. 김장철 엄마의 고생은 아랑곳없이 배추속에 굴 얹어 싸먹는 재미로 김장 날이 축제처럼 기다려지던 철없던 날들! 


최소한 200포기는 해야 겨울을 나던 시절, 겨우내 먹을 반찬이라곤 김치밖에 없던 시절... 하지만 우리는 그때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했고 눈코뜰새없던 고생스러운 살람살이로 그 행복을 다섯 자녀에게 마련하시던 엄마는 98세 노인으로 지금 이 시각 유무상통에서 초저녁잠이 깊으실 게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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