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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떠나는 ‘뒷모습’을 멋지게 보여주자고…
  • 전순란
  • 등록 2017-12-11 10:43:11
  • 수정 2017-12-11 10: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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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요일, 비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먼 데서부터 쏠쏠한 겨울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스산하다. 서울엔 눈이 많이 내려 쌓였다고,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엽엽한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이런 날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싫어 머리맡에 둔 ‘환경연합’ 잡지를 뒤적인다. 지구의 미래도 우울한데, 우리나라가 환경에 투자하는 비용이 OECD국가 중에 최하위라는 소식은 나를 더 우울하게 한다. 정말 이 나라의 병든 부분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유할까? 대통령의 걱정은 얼마나 클까?


마지막 한 장 남은 우체국 달력, 12월 낱장에 난데없이 20일이 빨간 날이다. 우리나라 달력인데 웬일일까? 다가가 살펴보니 '19대 대통령 선거일`이라 적혀 있다. ‘휴우~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네가 아직까지 대통령으로 앉아 그 기막힌 놀이로 나라를 망치고 있었다면?’ 정신이 번쩍 나며 “하느님 감사합니다!”가 절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다.


오늘은 좀 바삐 움직여야 한다. 11시에 산청에 있는 봉재언니네로 가서 옆 터에 지은 동생 신부님 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집들이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미루네 매장에 가서 차를 세우고 그니 차로 네 식구가 언니네 집엘 갔다.


임신부님 댁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비바람 피하고 추위더위를 막을 정도는 마쳐져 있었다. 누가 들어도, 대형빌딩이 아닌, 여나믄 평 주택을 2년 넘어서 지었다면 누가 믿겠는가? 연면적 수백평의 예술작품도 아닌, 요즘 한 달이면 뚝닥 짓는 판넬 건물을! 신부님이 직접 목공을 하실 줄 알고 건축내막을 아는 분인데, 시공자가 그렇게나 애를 먹였으니, 건축주는 성인 반열에 오르고도 남았다. 건축비를 미리 다 주고 타인의 선의와 선처만 바라다보니 그리 되었다. 여하튼 오누이가 마음수련을 톡톡히 하셨을 터!



우리는 원탁에 둘러앉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2주 미사를 드렸다. 특히 성탄과 연말 연시에 만나기 힘들 듯해서 남해 형부네 부부도 오시라했고, 이웃에 산다는, 분도출판사 (고)정한교선생의 동생 부부도 와서 반가웠다. 동생 정선생님의 부인은 모니카 언니의 교대동기이자, 보스코가 신학생 시절에 거창본당에서 만났던 사이였단다. 보스코처럼 사람을 기억 못하는 눈이, 그니를 눈여겨보고 50여 년 전을 알아보다니 신기하다. 세상은 둥글고, 인연은 이리저리 얽혀 있고, 좋은 분들 곁으로  모여 서로 만나고 또 다시 만남은 크나큰 축복이다.


언니가 점심을 마련하신다는 걸 미루와 반대하여 함양의 샤브향에서 점심을 함께 대접받았다. 우리와 만나자는 소식을 아침 9시에야 듣고서 부랴부랴 맛있는 남해 굴, 시금치, 무공해 유자를 챙겨 달려온 파스칼 형부네 부부와는 할 말도 많고 아쉬웠지만 오후 공소 모임이 있어 그만 헤어졌다, 내가 장을 봐가야 해서.


오후 4시. 운서 산골짜기에 있는 비비안나네 집에서 우리 동네 문정공소 연말모임과 성탄모임에다 판공성사(가톨릭신자가 일 년에 한두 번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행사를 이렇게 부른다)와 주일미사가 겸사겸사 있었다.


운서리 능선에서 건너다 본 휴천재


한 해 큰 탈 없이들 잘 지냈다. 특히 그 힘든 수술을 받고도 다시 자리를 함께한 체칠리아는 ‘인간승리’ 자체이고, 아무리 힘든 일에 부딪쳐도 좌절 말라는 표양이 되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는 동안 우리는 로사리오를 바치며 마음준비를 했다. 얼마 안 되는 공소신자들이지만 우리가 함께 한다는 건 큰 힘이 된다.


장신부님은 미사강론에 이곳에서 행복하게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천당이니 여기서 잘 살라고, 이왕이면 잘 살다 떠나는 우리의 ‘뒷모습’을 멋지게 보여주자고, 지금 여기서도 소리 없는 고생으로 밥하고 설거지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뒷모습이라고, 논에서 쟁기질하는 아버지, 밭에서 호미질하는 어머니 모습도 늘 뒷모습이었다고 하셨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를 떠올리며 한 해를 넘기면서 나는 어떤 뒷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남기며 떠나는 중인지 돌아보게 하는 강론이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리산속에서 삼천포 앞바다의 회를 먹었고, ‘미리 떡국’으로 한 살을 당겨 먹고, 미루네 엄니 100세의 생일 케이크를 미루가 우리 공소에 보내주어 후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하루에 두 가지 행사뿐이었는데 오늘은 좀 피곤하다. 산속의 빗소리를 이불로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든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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