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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아련한 기억속에 ‘가지 않은 길’을 담은 한 장의 흑백사진
  • 전순란
  • 등록 2017-12-13 12:16:45
  • 수정 2017-12-13 12: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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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1일 월요일, 눈


요즘 잊고 잃고 하는 게 한 둘이 아니다. 어젯밤 비비안나네 가서 미사 후에 누군가 가방을 두고 왔다고 가방 주인을 찾는 카톡이 교우들 카톡방에 떴다. 아무도 ‘내 것’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칠칠맞게 놓고 다닌다고 눈총 받을까 나서기가 부끄럽겠지.’ 했는데 바로 내 가방이었다! 


지지난 달 제주에 가서 렌트카회사에 차를 돌려주고 돌아서며 화장실에 핸폰을 놓고 온 듯하여 달려갔는데 없었다! 아연해하는 내게 보스코가 ‘무슨 일이냐?’고 묻고 ‘핸폰을 잃은 것 같아.’라니까 ‘당신 손에 들려 있는 건?’ 했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나은 편. 동네 아짐이 친구한테 전화를 했더란다. ‘나 클났다. 핸폰 또 잃어 버렸어, 울 냄편 알면 으쩌냐! 또 잃어 버렸다고 난리가 날 텐데.’ ‘그럼 너 지금 뭐로 전화하는 건데?’ ‘아~ 참. 이거 내 전화구나!’ ‘헐~’ 이런 아줌마에 비하면 난 훨씬 양호한 편이라 스스로 위로 하며 급히 나섰다. 





눈은 펄펄 내리는데 저 눈이 쌓이면, 운서리 가파른 산속에 자리한 비비안나네 언덕을 오르내리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었다. 부지런히 가서 가방을 찾고 곶감 손질하는 감동엘 들렀다. 대여섯 명 할메들이 부지런히 감을 만지고 있었다. 다른 집과 달리 유황 처리를 안 해서 때깔은 거무스레하지만 맛은 좋다. 비품 한 상자를 선물받고, 홍시가 되기 시작하여 곶감으로 깎지 못한 대봉시도 한 상자나 얻어왔다. 장신부님 전해 드리라는 들기름도 두 병이나 전리품으로 받았으니 건망증에 따라오는 소득이 짭짤하다.


오늘은 눈오는 창밖을 보며, 낼모레 발표할 책을 마저 읽으리라 작심했는데 어제 남해형부가 가져다주신 ‘무공해 유자’! 싱싱할 때 유자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해결하기 전엔 다른 일에 진도가 안 나가는 게 내 병이다. 유자청을 만들었더니 작은 병으로 7개. 이제 유자과자 만들 때도 걱정이 없다.





눈은 펄펄 내리죠, 눈길은 자꾸 눈발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하죠, 보스코도 2층 서재에서 일손이 안 잡히는지 간간이 식당채로 내려와 내가 무얼 하나 살핀다. 어제 생선회 먹은 게 그런지 속이 안 좋다고 죽을 쑤어 달라는 그에게 진밥에 시래기 국을 끓여주었다. 


어려서도 중학교 다닐 때도 자주 배가 아팠다는데 수십 년 후 성남에 계신 이민상 선생님이 내시경으로 보고는 십이지장 궤양을 심하게 앓은 흔적이 있다는 진단을 내린 적 있다. 나만 보면 늘 어딘가 아프기로 준비된 그와 오래 살다 보니 나도 그의 주치의가 다 되어 보스코에 관한 한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남았다.


대학 시절에도 보스코가 아프다며 기숙사 침실에 누워 있으면 친구들이 동정을 하고 밥도 날라다주는데 같은 교구 김해동 학사님이 아프다면 그 큰 거구를 보고서 아무도 믿어 주지를 않아 억울해 했단다. 그렇게 억울하게 아프던 분은 사제서품을 받은 이듬해에 돌아가셨고, 당당하게 아프던 보스코는 아직도 살아 있으니 ‘골골팔십’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건가?




보스코가 어디서 찾아냈는지 어제 만난 정선생 부인과 자기 친구들이 거창에 와서 놀러갔던 흑백사진을 보여준다. 은퇴하고 한참 지난 정신부님, 은퇴가 가까웠을, 거창출신 신 신부님,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김 신부님이 교대를 졸업하고 첫 부임지가 거창이었다는 히야친타 선생과 함께 나오는 사진이다. 1970년에 찍혔으리란다. 거창 수송대 물가에서 벗고 찍힌, 50여 년 전 보스코는 그야말로 비아프라에서 건너온 불쌍한 난민이지만 그가 자꾸만 그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는 까닭은, 아련한 기억 속에 그가 ‘가지 않은 길’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처럼 바람의 방향이 사나우면 벽난로에 느닷없이 바람이 훅 하고 새어나온다. 방안에서 연기냄새에 절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보스코가 말없이 옷 냄새를 맡는다. 그럴 적마다 테라스에 옷을 널어 바람을 쏘이곤 하지만 이 겨울에 좋은 건 벽난로 장작에 고구마를 실컷 구워 먹을 수 있다는 거다. 오늘은 군고구마에, 미루가 갖다 준 백김치로 하루를 마감하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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