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세월이 바람같이 흘렀다. 지나고 나면 5년 세월도 순식간이어서, 처음과 끝은 동시였다. 오는 것과 가는 것, 만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 모든 것은 ‘동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찰나’를 살 뿐이었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지난 11월 하순에 사제 이동이 있었다. 전에는 매년 1월이나 2월에 사제 이동이 있었으나 올해부터는 11월로 앞당겨졌다. 눈 내리는 한겨울에 새 사제 서품식을 열고 뒤이어 사제 이동을 하는 것은 너무 불편했다. 그럴 것 없이 두세 달 앞당겨 가을 끝자락에 서품식을 갖고 또 사제 이동을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교구청에서 채택됐다.
그래서 대전교구는 지난 11월 3일 사제 서품식을 열었다. 또 처음으로 당진군 우강면에 있는 솔뫼성지의 아레나광장에서 거행했다. 전에는 대전 대흥동 주교좌성당이 서품식 장소였으나 수품 사제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대성당도 비좁은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대전 충무체육관이나 천안 유관순체육관을 사용했는데, 비용을 들여 대중 시설을 빌리는 것도 그렇고 체육 시설에서 종교 행사를 갖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전국의 모든 교구들 중에 가장 많은 성지를 보유하고 있는 대전교구는 올해 처음으로 솔뫼성지 아레나광장에서 사제 서품식을 거행함으로써 장소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다. 실내 공간이 아닌 광장을 사용하자니 계절 문제를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11월 초에 서품식을 거행하게 됐다.
새 사제 탄생과 사제 인사
올해의 서품식에서는 16명의 새 사제가 탄생했다. 1명은 대전교구 소속이 아닌 수도회(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도회) 소속이었다. 새 사제들이 탄생함에 따라 사제 인사가 발표되었다. 천주교의 각 교구는 관례적으로 사제 서품식에 이어 사제 인사를 발표하는데, 대전교구의 경우 전체 사제들 증 절반 정도가 자리를 바꾸게 됐다.
본당 주임신부는 대개 5년이 임기이고, 보좌신부는 대개 2년이 임기였다. 이에 따라 태안본당은 주임신부와 함께 보좌신부도 이동을 하게 됐다. 태안본당 제14대 주임 최교선 토마스 신부는 ‘안식년’ 발령을 받았고, 여덟 번째 보좌였던 정준호 베드로 신부는 교구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최교선 토마스 주임신부가 부임할 때 보좌인 나기웅 엘리아 신부도 함께 부임했다. 2년 후 나기웅 엘리아 보좌신부는 대전으로 자리를 옮겼고, 몽골에서 돌아온 박주환 미카엘 신부가 태안 보좌로 왔다. 1년 후 박주환 보좌신부는 건강 문제로 요양 발령을 받았고, 3년차 사제인 정준호 베드로 신부가 태안 보좌로 왔다. 그래서 태안본당은 올해 주임과 보좌가 함께 이동 발령을 받게 됐다.
정준호 베드로 보좌신부와 함께 했던 2년은 말할 것도 없고 최교선 토마스 주임신부와 함께 했던 5년도 금세였다. 정말 순식간이었고, 바람같이 지난 시간이었다. 부임할 때의 모습과 떠나갈 때의 모습, 그리고 그 시간들은 하나로 겹치는 양상이었고, 그야말로 ‘동시’였다.
그 5년 동안 태안본당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2014년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고, 2015년 최교선 토마스 주임신부의 사제 서품 25주년 기념(은경축) 행사도 있었다.
본당 밖(?)의 일이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도 있었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도 있었다. 또 2016년 ‘촛불혁명’도 있었다. 본당의 큰 행사들과 더불어 국가의 큰 사건들이 그 5년 안에 있었다.
내 개인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2014년 아내가 환갑을 먹었고, 2015년에는 2005년 상처(喪妻) 이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동생이 드디어 재혼을 하는 경사가 있었다. 2016년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직장을 얻어 올해 결혼을 하는 경사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과 싸우던 나는 결국 건강을 잃어 2016년 복막투석 환자 신세가 되었고, 뒤이어 아내가 초등학교 교원 생활 40년을 마감하고 정년퇴직했다. 올해 2017년에는 연세 94세인 노친이 결핵 전문병원인 서울 은평구의 ‘서북병원’ 입원을 거쳐 서천어메니티 복지마을의 노인요양병원에 입원하시는 일도 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지난 5년 안에 있었다. 우리 집과 우리 교회와 국가를 관통하는 경사들이 있었고, 또 내 개인의 불행과 함께 국가적인 불행도 있었다. 한마디로 다사다난했던 5년이었다.
‘정들자 이별’이라는 말의 실감
그 5년 세월을 뒤로 하고, 5년 동안 본당 신자들과 정들었던 최교선 토마스 주임신부는 세 번째 임지였던 태안본당을 떠나 ‘안식년’으로 들어갔다. 안식년을 마치고 1년 후 다시 어느 본당으로든 발령을 받게 되면 쉽게 소식도 들을 수 있고 교구 행사 중에 얼굴도 볼 수 있겠지만, 안식년 동안에는 소식도 들을 수 없을 터였다.
태안본당 신자들은 또 한 번 ‘정들자 이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무릇 헤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지난 11월 19일(연중 제33주일/평신도주일) 교중미사는 ‘송별미사’였다. 영성체 후에 송별식이 거행되었다. 성가대는 ‘지금은 헤어지지만’이라는 송별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들으며 많은 신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최교선 토마스 주임신부는 22일 오전 평일미사 후 손수 운전을 하여 태안본당을 떠나갔다. 또 정준호 베드로 보좌신부는 24일 오전 교구청으로 떠났다.
그리고 같은 날 오전 제15대 주임 이진용 베드로 신부와 함께 아홉 번째 보좌인 박시용 베드로 신부가 함께 부임했다. 박시용 베드로 보좌신부는 월초에 탄생한(솔뫼 솥에서 막 꺼내어진 따끈따끈한) 새 사제였다.
이진용 베드로 주임신부는 환영 나온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나를 보시고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일찍이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니, 신부님의 그 말은 나를 잘 알고 계시다는 뜻일 터였다.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답하면서 이진용 신부님이 내 글을 많이 읽으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앞으로 맞게 될 5년이라는 시간이 묘한 긴장감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맞게 될 5년 안에는 또 어떤 일들이 있을까? 환자에다가 장애인인 내가 5년 동안 무사히 살 수는 있을까? 5년을 잘 살아낸다면, 5년 후에는 또다시 바람 같은 세월을 실감하면서 ‘정들자 이별’을 체감하지 않을까?
5년 동안 정들었던 사제를 떠나보내고 다시 5년 동안 정이 들 사제를 맞으면서 5년 후를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묘한 긴장과 두려움 같은 것은 무엇일까? 알게 모르게 나는 내 나이를 의식하는 것 아닐까? 홀몸으로 왔다가 홀몸으로 돌아가는 사제들처럼 나도 욕심 없이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의가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11월이 가나 싶더니 또 어느새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