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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한 여자를 ‘내 살 중에 살, 내 뼈 중에 뼈’라고까지 느끼려면
  • 전순란
  • 등록 2017-12-20 10:36:28
  • 수정 2017-12-20 10: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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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월요일, 맑음


서울에도 인천에도 용인에도 눈이 많이 왔다며 친구들 모두가 좋아한다. 다들 강아지띤가 보다. 눈이 오면 하늘을 보며 겅중거리고 누구라도 만나면 ‘눈도 오는데 우리 친구해요’라며 얼굴을 핥겠다고 뛰어오른다.


지난 10월 중순에 유영감님을 보고 두어 달이 지났는데도 기척이 없어 지난번처럼 어디 입원이라도 하셨나 전화를 했다. “어데! 아픈데 엄서. 여기? 화계 사는 친구가 불러 왔제.” 내 목소리를 들으면 영감님 음정이 한 옥타브 올라가고 말이 빨라진다. 워낙 사투리가 심하여 내용은 반쯤만 알아듣고 심정은 100% 알아듣겠다.


할머니가 당뇨합병증에다 치매로 영감님을 어지간히 고생시켰을 때도 밥해 먹고 청소하고 농사까지 말끔하게 해낸 것으로 보아 천성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화롭게 갖고 계신 분 같다. 콩을 사러 그댁 곳간엘 가면 곡식들이며 연장들이며 창고바닥이 얼마나 말끔하게 정리정돈되어 있는지 아낙인 나도 혀를 내두른다.




저런 깔끔한 남자를 못 따라가는 아짐들이 되레 ‘뭔 남자가 그리 쪼잔하노!’라며 ‘뒷다마’를 깐다. 그래도 그 영감님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여인이 하나 마을에 있으니 바로 나다! 그래서 내 전화 한통에 영감님이 저렇게 업업 되나 보다.


헌데… 남의 남자 깔끔한 건 이렇게 칭찬까지 하면서도 보스코가 내 살림살이를 열고 들여다보고 서 있으면 내가 스프링처럼 튀어오른다. 바빠서 대충 던져 넣은 옷가지, 손님오신다고 급히 치운 물건들, 벽장에 두서없이 쌓인 식품들, 남은 음식 록글래스들이 쌓이고 쌓인 냉장고 안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남편을 발견하는 건 주부에게 그야말로 공포요 수치다.


정리를 해 준다 치자. 그런데 그가 손을 대고나면 어디에 무엇이 있나 찾아낼 길이 없다. 내가 찾아내 내가 쓸 수 있으려면 모조리 다시 정리해야 할 판이다. 그래서 오늘도 보스코에게 협박을 했다. “여봇, 내 물건에 손대지마! 제발 정리 좀 해주지 마! 그랬다간 당신 책들을 색깔대로나 키대로나 두께대로 정리하고 말 테니까, 당신 절대 못 찾게.” 


내 소란에 그는 그냥 빙그레 웃음을 띠고 음흉하게 작전상 후퇴를 한다. 그거라도 해주겠다고 나서는 건 내 남편밖에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어제 보스코 동창 행두씨가 부인 무릎수술 날짜를 받고나니 차라리 자기가 수술받는 게 낫겠더란다. 성서에 나오듯 한 여자를 ‘내 살 중에 살, 내 뼈 중에 뼈’라고까지 느끼려면 최소한 50년은 데리고 살아야 할 게다.


오후 1시에 마산 구산면으로 떠났다. 그곳 성혈흠숭회 피정의 집에서 부산신학교 교수신부님들의 피정에 강연을 하러 간 길이다. 1997~98년의 보스코의 안식년이나 2003~2007년의 공직생활 중에 유럽에서 만난  분들이어서 낯설지 않았다.





보스코는 평소의 신념대로, 신부님들이 양성하는 신학생들을 ‘새로운 복음화의 사도’로 가르쳐야 한다고, ‘사회복음’을 펴서 신자들에게 ‘사회적 사랑’을 배양해야 근본주의 신심위주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강연을 했을 게다.


그동안 나는 흠숭회 원장을 지낸 이영자 글라라 수녀님을 만났다. 1994년 북경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하면서 처음 만났으니 23년만이다. 긴 세월이었지만 그 모습 그대로여서 사랑스럽다. 그 수녀회는 여성의 전화, 이주여성쉼터, 그룹 홈 등 사회 약자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피정의 집 옆에 있는 그룹 홈에도 언어장애의 6세 막내부터 초딩 4,5,6학년에다 중딩1(불우한 가정에서 커서 다들 ‘발달장애’란다)까지 다섯 명을 키운단다. 수녀 한 분이. 


보스코의 두 시간 강연이 끝나고 신부님들과 저녁기도를 성당에서 함께 바치고, 신부님들의 피정 식탁에 초대받아 싱싱한 회와 굴이 차려진 저녁을 먹고서 밤길을 달려 집에 오니 9시. 제네바에도 첫눈이 오고 두 손주도 성탄 학예회를 마치고 낼모레면 성탄방학을 시작할 게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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