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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모든 만남은 헤어짐으로 끝난다
  • 전순란
  • 등록 2018-01-08 09: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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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7일 일요일, 흐림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도 사람들이 나와 작별하러 모여서 웃으며 얘기하고 맛나게 먹고 즐겁게 놀다 헤어지면 좋겠다. ‘그 여자 꼴 안 봐서 시원하다!’가 아니고 ‘참 편히 갔구나. 나도 잘 살아 그곳에 가면 오늘 이 얼굴들과 만나 반갑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니면, 내가 좀 서둘러 가고 누가 좀 늦을지라도, 그곳엔 시간 개념이 없다니까, 하느님 마음으로 서로를 기다리면서도, 문태준 시인의 마음처럼, 좀 서글프게 서성거릴까?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문태준,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9시 30분 살레시오 관구관 7층에 올라가니 박양웅 신부님이 하얀 제의를 차려 입고 새 구두까지 신고 먼 길 떠날 채비로 누워계셨다. 평상시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멀어져가는 자리에 저렇게 두 손 합장하고 편히 누워만 계시겠는가?



남의 시선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진 신부님 손을 가만히 잡아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전해온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 그분에게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그 손을 꼭 한번 더 잡아보고 싶었다. 잘 가시라고, 곧 또 만나자고…


30여 년 전 이탈리아에 있을 때, 보스코에게는 아버지 같으셨던 마신부님과 사돈되는 이탈로 영감님이 만토바에서 돌아가셔서 로마에서 수백km 떨어진 만토바까지 간 일이 있었다. 자녀가 없어선지 나를 각별히 예뻐해 주셨기 때문이다. 장의사들이 얼마나 시신을 잘 만져드렸는지 평소보다 더 환한 얼굴에다, 늘 휠체어에 앉아 계시던 다리도 시원하게 쭉 펴놓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남녀 불문하고 양 볼을 비비며 만나고 헤어진다. 지상에서 영이별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인사를 보내나 관심 있게 보았더니 모두 시신의 양 볼을 비비며 평상시와 다름없는 이별의 입맞춤을 했다. 나도 그들처럼 그 영감님에게 평소 해드리던 바쵸를 했다. 차디차긴 했지만 이 양반이 떠나가도 곧 만나겠구나 하는 느낌이 오고 슬픔을 가라앉히며 보내 드릴 수 있었다.


(1980년 9월에 이탈리아로 먼저 떠난 보스코, 내가 반년쯤 지나 두 아이를 데리고 로마 공항에 도착했더니만 빵기 빵고 두 아이만 얼싸안고 좋아했다. 내게는 반년 만에 만나 건넨다는 인사가 ‘잘 있었어?’가 전부. 공항까지 보스코를 태우고 우리를 마중나온 바죠 신부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애들이고 주변 시선이고 아랑곳없이 부부가 껴안고 찐한 러브신을 펼칠 장면과는 너무나도 달라서였을 게다.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빙빙 돈다”는 민요 그대로!)


오늘 구로성당 연령회 봉사자들이 박신부님을 제의 위로, 똘똘 만 창호지로 꽁꽁 묶더니 열 명 가까운 장정들이 뿔끈 들어 좁다란 관속으로 옮겨넣고서 관뚜껑을 닫자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시 그 얼굴을 못 보리라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입관식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육신의 혹심한 고통을 짧게 받고서 놓여나셨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로마에서 인연을 맺은 지인들과…


그분을 보내는 미사를 드리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6층 식당으로 옮겨, 점심을 먹으면서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우리가 로마에서 사귀었던 교우들은 참 오랜만이어서 아래층 커피샵으로 내려와 그동안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로마에 새로 생긴 한인본당의 초대주임사제로 10여 년 사목하셨으므로 그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한참이나 박 신부님과의 추억을 더듬다 헤어졌다. ‘주님의 공현대축일’에 동방박사들도 아기를 보러 왔다가 만나보고선 아기와 헤어져 딴 길로 돌아갔듯이, 서럽고 반가운 모든 만남도 헤어짐으로 끝난다.


상가에서 돌아오는 길, 시청앞을 지나면서는 ‘우리 원순이’가 살고 있어 기분좋았고 


광화문 앞을 지나면서는 인왕산 밑에 ‘우리 이니’가 살고 있어 좋았고 


우이동 인수봉 밑에는 우리가 살아서 좋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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