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 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미국의 신학자 마이클 노박(M. Novak)은 “21세기는 최근 500년간에 일찍이 없었던 종교의 세기가 될 것 같다”고 진단한다. 그는 인류사회가 갖가지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바라던 모든 것을 성취한 승리의 시기에 오히려 종교는 본질적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음을 주목한 것이다. 지난 500년간 인류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넣었던 정치 경제적 문제들이 유혈로 점철된 20세기를 마감 하면서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이에서 파생된 윤리적 문제들을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믿음의 한계가 드러나 결국 현재의 위기가 윤리적 차원이 아닌 종교적 차원의 문제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1세기를 종교의 세기로 가정하는 것은 계량적 가치에 매몰되었던 물질문명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는 물질문명의 혜택을 어떻게 분배 하느냐를 따지는 사회체제 선택의 중요성이 상대화되는 것을 뜻한다. 사무엘 헌팅턴(Samuel Phillips Huntington, 1927-2008)의 『문명의 충돌』은 문명사적 관점에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견한 책이다.
냉전 종식으로 인한 오늘날의 세계를 그리스도교 국가, 중국, 아프리카권, 아랍 등으로 나눠 조명하고 향후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중국이 크게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곧, 냉전붕괴 이후의 세계 구도가 정치경제의 패러다임에서 문명-문화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게 되고, 그 결과를 예측함에 있어 세계는 그리스도교 문화권과 이슬람문화권 그리고 유교문화권으로 3분할되는 가운데 종국에는 서구국가의 그리스도교 대 중국을 비롯한 이슬람-유교 커넥션의 충돌로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컬럼비아 대학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이슬람에 대한 헌팅턴의 견해를 주목하면서 서구인들이 이슬람교도에 대해 ‘광적인 테러리스트집단’이라는 경계심을 풀지 않는 한 이슬람과 서구 문명의 화해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새 천년의 과제는 문명-문화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종교 파워가 등장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미래의 세계구도와 그 운명은 문명-문화 즉 종교 파워가 충돌할 것인가, 융합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종교문제는 21세기 최대의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스도교회가 이러한 현대사회의 흐름 가운데에서 정체성에 혼란이 생겨난 것은 단순히 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무신론적인 사고가 팽배해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은 이미 오래 전의 것이고 추상적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사고와 이분법적인 교의들과 천사와 악마라는 양분된 극단의 대립을 통해 교회의 명분과 열심을 유지해왔던 교회 운영자들의 문제가 더 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수많은 이단들과의 싸움, 중세에는 이슬람과 대적하고, 계몽 시기에는 무신론과 인문주의와 선을 긋고, 근대에는 자연과학주의, 현대기술만능주의, 맑시즘과 대립한다. 지금 21세기 삼천년 기를 바라보며 여기에서는 ‘교계제도’와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세력과 대립하고 있는 것이 교회 운영의 빈곤한 영성이다.
그러나 위기의 시대에 교회에 새로운 활력과 영성을 제시했던 많은 영성가들은 통합과 융합, 곧 용서와 화해를 가장 훌륭한 덕목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삶을 담대하게 전개해 나갔다. 동료들에 의해 톨레도 감옥에 갇혀 죽음의 위험에 처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가르멜의 개혁에서 동료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위기를 맞이했던 예수의 대 데레사 역시 그들의 원수들과 적대자들을 항해 비난보다는 용서와 화해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 그들을 더욱 높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한 동력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길을 나서는 것, 우리 자신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계속해서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러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1,38) 일단 어떤 곳에 씨앗이 뿌려지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혹은 더 많은 기적을 베풀려고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을 다른 이웃 고을을 향해 길을 떠나도록 하십니다. (『복음의 기쁨』, 2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쇄신’과 ‘대화’라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교회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며 미래에 대한 기쁨과 희망을 피력한 공의회였다. 요한 23세 교황은 “교회가 폐쇄되어 질식 상태가 되었으니 숨이 막혀 못살겠다. 창문을 활짝 열어라!”고 말씀하셨다. 교황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가운데에서 교회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고백하며 지난 시간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했음을 통렬히 반성 했다. 그리고 복음의 현대화와 세상의 징표를 안고 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절실히 느끼며 공의회를 주도한다.
요한 23세는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읽고 과거의 교회상을 반성하고 쇄신하며 어떠한 비판도 수용하지 못했던 독선적인 과거의 교회를 비판하며 미래의 교회를 꿈꾸었다. 이러한 요한 23세의 정신은 공의회 문헌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별히 사목헌장 제4항에서는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18세기 계몽의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인류 보편의 인식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과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이라는 평범하고 단순한 그리스도교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교회 자신은 그 말씀을 오늘에 살지 못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하고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슬러 동료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지독한 패거리 의식과 자폐적 무리들이 교회 내에 만연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제도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배적이고 명령하고, 권위적이고, 소통하지 못하는 지도자들과, 투명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교회 공동체의 운영방식이 그 이유다. 본당이나 기관의 전결권을 가지고 있는 사제가 독불장군이나 행정가처럼 때로는 중소기업의 사장처럼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운영하는 방식에 많은 신자들이 회의를 느끼며 교회를 떠나고 있다.
저는 모든 공동체가 가만히 있지 말고, 사목과 선교 안에서의 ‘회개(conversion)’라는 길을 따라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교회 운영”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우리 자신이 언제나 “파견 중”인 모습을 비출 수 있도록 합시다. (『복음의 기쁨』, 25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