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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한다. 아직 살았든 죽었든…’
  • 전순란
  • 등록 2018-02-05 10:27:20
  • 수정 2018-02-05 10:3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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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3일 토요일, 맑음


먼 산엔 흰 눈이 내렸지만 정작 휴천재 테라스와 마당은 이탈리아 크리스마스 케이크 빤도로 에 뿌린 가루설탕 만큼만 흩뿌려져 바람이 한 번 찍어 먹으면 곧 흩어져 사라진다. 갑자기 다시 추워진 날씨로 벽난로에 나무를 많이 넣었는데 아래층 전체에 연기 냄새가 심하게 나서 고민이다.



그렇다고 벽난로를 뜯어버리기도 아깝고, 비록 참나무를 때지만 아래층 진이네 집에 ‘연탄가스’ 피해가 되어 미안하다. 궁리궁리하다가 ‘함양벽난로’에 전화를 하니 연통에 끄으름이 차서 그럴 게란다. 그런데 기역자로 벽으로 뺀 연통이라서 밖에서 다시 꺾인 부분에 T자 꺾임통을 달아야 위로 오르든 안으로 들어오든 연통 위와 옆을 동시에 청소할 수 있는데 자기네는 그 T자 부속이 없단다. 생각다 못해 4년 전 난로 연통을 산 박사장님네 매장으로 전화를 하니 아직 전업을 안 하고 그 일을 한단다. 더구나 내 ‘휴천재일기’ 애독자라며 연통 값을 만원이나 깎아주었다. 이리도 고마울 수가!





외국에서야 한자리에 같은 주인이나 그 아들, 혹은 가족으로 이어져서 10년, 20년, 아마도 100년이 지나도 같은 가게가 같은 이름으로 열려있는 가게가 많다. 지난여름, 80년대 우리가 5년 넘게 살았던 동네 오스티아를 찾아간 길에, 옛날에 간혹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빠를 찾아갔다. 아직 그 자리에 그 이름으로 열려있기에 들어갔더니 30년 만에 갔는데도 그 집 아들이 카운터에서 나를 맞으며 반가워했다. 우리 작은아들 빵고랑 같은 초딩 반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난여름 돌아가시고 이젠 자기가 주인이라며 색시도 인사를 시켰다.


종일 책을 읽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올라오는데 드물댁이 집에서 막 나온다. ‘어째서 마을회관에 안 갔냐?’니까 ‘엄니, 날씨가 추우니 전기장판도 틀고 제발 기름도 때라’는 자식들 성화에 방을 덥힌 게 아까워 지금까지 누워있었다며 몸 좀 녹이고 올라가란다.



그니의 방에 들어가 몇 신가 시계를 보니 오후 9시! 시계 바늘이 9시에 멈춰 있다. 시계를 떼어서 살펴보니 배터리에 녹이 쓸어 휴천재에 올라와 새 배터리를 가져다 바꿔주었다. ‘이집 지었을 때 딸이 사 왔으니 족히 30년은 됐다’는 얘기. “그런데 시계의 글자는 알아요?” 물으니 “몰라. 핸드폰에서 맨날 몇 시라고 갈켜 줘. 틀리는 시계라도 시계부랄이 움직이니 심심치가 않아…”라는 말끝에는 자식들 외지에 보내고 홀로 사는 외로움이 묻어난다. 시분을 못 읽어도 ‘부랄’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제몫을 다한다니 새 시계 살 것 없이 그냥 쓰라고 했다.


식당채에서 내가 뭘 하나 불심검문을 내려온 보스코. “커피 한 잔 할까?” 커피와 쿠키로 오후 간식을 하며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비치는 앞산 자락을 함께 본다. “참. 좋다.” 행복이란 아주 가까이 소소하고 소박하게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한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속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 존재하든 안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이의 영상을 방해할 순 없다. 사상가들이 외쳤던 최고의 진리란 바로 사랑이고 인간이 추구할 가장 숭고한 목표다.”


더 놀라운 건 수용소 그 극한상황에서 작은 일들에 감격하는 모습이다. 해가 넘어가는 철조망 서쪽하늘의 구름이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고 감탄할 수 있었던 마음밭!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향해 열린 눈’이 그를 살아서 걸어 나오게 했다!


책을 들면 시간을 잊어버린다고 타박하는 보스코에게 8시가 다 되어 저녁을 차려주고 마주앉아 그를 바라본다. 늙어가는 보스코, 그가 바로 내 최고의 가치이고 죽음 저 너머까지 함께 할 존재이기에 감사한다. 바로 이런 마음에 주님이 함께하심도 우리는 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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