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민간지원단체인 <평화3000>의 자문위원으로 매월 일정 금액의 회비를 내고 있다. 2003년 초창기부터 참여했는데, <평화3000>의 일원인 것을 내 인생의 보람으로 여긴다.
2003년 11월 24일 창립한 <평화3000>에는 천주교 사제들과 수도자들, 개신교 목회자들, 불교 스님들 등 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천주교 인천교구 호인수 신부가 초대 이사장을 맡았고, 빈민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고(故) 제정구 선생의 부인인 신명자 여사가 2대 이사장으로 오랫동안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2016년부터는 천주교 청주교구 원로 사제인 곽동철 신부가 3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평화3000>의 모든 사업들을 총괄적으로 기획하고 집행하는 기구로 운영위원회가 있는데, 천주교 ‘예수전교수도회’ 사제인 박창일 신부가 줄곧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박창일 신부는 2016년 국정농단의 핵심인 최순실의 존재를 맨 처음 JTBC에 알려 ‘촛불혁명’의 단초를 이룬 분이기도 하다.
운영위원이기도 한 천주교 ‘작은형제회’ 소속 석일웅 수사의 안내로 <평화3000>의 일원이 된 나는 2005년 11월 28일 저녁 서울 세종호텔 세종홀에서 열린 ‘평화3000 후원의 밤’ 행사에서 축시 <평화 3000은 오늘도 3,000리를 간다>를 낭송했다. 그리고 2013년 10월 9일 저녁 서강대학교 메릴홀에서 열린 ‘평화 3000 창립 10주년 기념 도라산 평화여행’을 경축하는 축시 <도라산에는 철길이 있다>를 낭송했다.
엊그제 일같이 기억이 명료한데 세월이 바람같이 흘러 어느새 13년 전, 또 5년 전 일이 됐다. 새삼스레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
평양과 묘향산에서 기도하다
그런데 내가 무엇보다도 즐겁게 기억하는 것은 2005년 <평화3000>의 일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일이다. 그해 10월 13일 오전 순안공항에 도착하여 평양의 요소요소를 둘러본 다음 저녁에는 능라도에 있는 ‘5·1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대동강의 양각도 호텔에서 일박했다. 양각도 호텔의 맨 꼭대기 층인 47층은 스카이라운지였다. 전체가 서서히 회전을 하는 식당이었다. 그 회전식당에서 지금은 고인이신 소설가 권태하 선생 등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회전식당이었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평양의 야경을 볼 수는 없었다. 평양은 불빛이 없는 도시였다. 사면팔방 어디를 봐도 어둠뿐인 암흑세계였다.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보았던 웅장하고 화려한 ‘아리랑’ 공연과는 그야말로 대조를 이루는 풍경이었다.
나는 1만여 명이 함께 한 갖가지 형태의 무용과 집단체조, 수만 명이 한 사람처럼 동작하는 스탠드의 현란한 카드섹션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키곤 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엄하고 화려한 군무(群舞)들은 완벽한 집단성과 조직성의 표징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정체 모를 공포감에 몸을 떨곤 했다.
그런데 그 현란함과 대조를 이루는 평양 시내의 이 불빛 없는 풍경은 대체 뭐란 말인가. 공연한 의문과 슬픔에 목울대가 아려서 자꾸 맥주를 마시게 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불빛 없는 평양의 밤을 밝게 만드는 것은 오늘 평양을 방문하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더 많이 자주 평양을 방문하고, 남북 교류가 확대되고 빈번해지면 알게 모르게 변화가 생겨나서 불빛 없는 평양의 밤도 밝아지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가을이 물드는 묘향산을 구경했다. 묘향산의 보현사를 둘러보며 석불들 앞에서 기도를 했다. 천주교 신자지만 나는 보현사의 석탑과 석불들 앞에서 묵주를 쥔 채 오래 조국의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기도를 바치곤 했다.
그 뒤 나는 또 한 번 평양을 가려고 했다. <평화3000> 운영진에 또다시 평양에 갈 뜻을 표하기도 했다.
도라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파리에 가는 꿈
하지만 2007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곧이어 남북 교류가 전면 중단되면서 평양을 다시 가고자 했던 내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남과 북은 더욱 멀어지고 한기만이 감도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가장 좋아하는 쪽은 과거 36년 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했던 것은 임진왜란 때 한 번 도출되었던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 때문이었다. 일본은 바다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형국이다.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면서 북으로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 옛날 고구려 떼에는 만주는 물론이고 요동반도까지 우리 영토였다. 우리에게는 대륙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 이 대륙 기운을 다시금 살려나가야 한다.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다시 평양에 가는 꿈이고, 개마고원을 밟는 꿈이고, 중국 땅이 아닌 북한 땅을 밟고 백두산을 오르는 꿈이다. 또 도라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 철교를 넘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달린 다음 프랑스 파리에 도달하는 꿈이다.
당장 통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남북 교류가 확대되어 마침내 도라산 열차가 파리로 출발하는 날이 오면 남북 경제는 한껏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경제를 확실히 살릴 수 있는 길은 대륙 진출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그런 꿈을 꾸게 된다. 평창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고, 남북한 선수단이 함께 입장하고, 여자아이스하키는 단일팀을 이루고, 북한 예술단이 강릉과 서울에서 공연하는 모습 등을 보며 환호작약하는 심정이다..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이라고 폄훼하며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무리들이 도처에서 발광을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내 꿈은 오히려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돕고자 막대한 규모의 갖가지 물품들을 지원했던 <평화3000>은 이명박에 의해 남북교류가 차단되면서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등지로 방향을 돌렸다. ‘촛불혁명’에 의해 탄생한 민주정부가 방향타를 잡고 있는 오늘, 이제 다시 대북지원 사업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확대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