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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음력 마지막 날에 뒤돌아보는 한 해도 애오라지 사랑받은 은총의 세월
  • 전순란
  • 등록 2018-02-16 10:23:52
  • 수정 2018-02-16 10: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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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15일 목요일, 맑음

 

이사야는 늘 엽렵하고 남을 배려하여 어제처럼 산을 내려오는 길에도 자기가 먼저 서둘러 내려가 명상의 집에 세워둔 차를 끌어다 등산로 입구에서 우릴 기다리겠다고 앞장섰다. 거기까지 차를 운전했던 아내한테 차키를 달란다. 이미 장갑 한쪽을 잃어버린 미루는 얼굴이 어두워져 주머니마다 또 앞가방을 속속드리 수소문하는데 열쇠 행방이 묘연하다.

 

그렇게 산을 내려가는 내내 이사야는 앞서 내려가며, 미루는 뒤따르며 우이령길을 구석구석 뒤졌고 우리 둘도 모든 길섶을 둘러보았지만 장갑도 차키도 흔적이 없었다. 우이령 입구 초소를 지키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사람들에게 나중에라도 분실물을 누가 가져오면 연락해 달라고 보스코 명함을 건네주자 오늘은 왜 이리 열쇠 찾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어요라며 갸우뚱한다. 이사야, 미루, 우리 부부가 차례로 신고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명상의 집에 도착한 이사야는 수도원 언덕길에서 아내가 떨어뜨린 장갑도 줍고, 차에 갔더니만 자동차 문 안쪽 수납에서 열쇠가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더란다!





우리가 타고 온 자동차 키가 없어졌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네 사람의 생각은 각기 달랐다. 이사야는 열쇠를 잊고 쩔쩔매는 아내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여러 버전으로 고민하다 화내지 말고 아무 말 말아야겠다맘먹었단다. 당사자 미루는 혼이 반쯤 나가 샛길마저도 놓치고 니나노 골짜기까지 한참 내려갔다가 돌아오며 네이버에서 15만원 주면 30분 안에 와서 키를 깎아드립니다는 사이트를 찾아냈단다. 보스코는 우리 키도 그 차 트렁크에 있으니 골짜기 입구까지 걸어내려가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내 차를 타고 넷이서 정동까지 가자는 방안을, 나는 오늘 저녁약속은 취소하고, 우리 차로 용인에 있는 미루네집까지 가서 스페어키를 가져다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4시간쯤 걸리겠다며 시간 계산을 했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성인인지 마르티노 성인인지(물건을 잃어버리면 우린 후자에게 매달린다) 다행히 열쇠를 찾아주셔서 모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평소 정신없고 물건 잃어버리는데 일가견 있는 나로서는 뭘 잃어먹는 게 일상이 되어 미루 정도의 사고는 애교다. 얼마 전에도 시장 갔다 와서 검은 시장봉지에 핸폰을 넣어 냉장고에 함께 넣고서는 애타게 찾던 기억을 비롯해서(더구나 소리마저 진동으로 해 놓았다) 사사건건 열거하자면 소설이 될 게다. 그때마다 보스코는 참 한심하다는 눈길 정도여서 남편 눈치를 보진 않는다. 미루나 나나 ‘!’하고 소리지르지 않는 유순한 남편을 두면 도봉산 오봉 바위처럼 마음 든든하다.



오늘 점심에 엄엘리가 남편과 함께 세배를 왔다. 점심은 나가서 먹자지만 어제 온 친구가 만두전골배달을 왔으니 그걸 먹자고 제안했다. 목수를 생업으로 하는 조선생은 몸을 움직여 삶을 꾸리는 사람답게 진솔하다. 남편과 동지로서 살아온 둘은 그간 수년간 바깥으로 헤어져 지낸 애틋한 시간만큼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우리 눈에도 참 사랑스럽다. 바쁠 텐데도 때마다 우리를 찾아주는 것도 고맙고, ‘대통령 하나 바뀌었는데도 이렇게 모든 게 순리대로 풀려나가는 게 놀라워요!’란다는 그 집 딸내미 말처럼, 두 사람이 꿈꿔온 세계가 한 걸음 가까워진 것만도 참 다행이다.



저녁으로는 멀리 남해 형부가 보낸 생굴을 쪄서 까먹었다. 싱싱하고 짭쪼롬한 바다 향기가 집안 가득하다. 지리산 산사람들에게 바다를 함께 담아 선물 하느라 산청까지 달려왔을 형부의 발걸음에 우리 모두가 각별하게 감사함은 정작 당신은 생애 가장 힘든 투쟁을 겪고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밤에 빵고가 연락을 했다, 오스티아의 까르멜라 아줌마 댁에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고. 친구 아들이 왔다며 평소 빵고가 좋아하던 음식을 소상히 아는 그니(빵고가 세 살 적부터 그 집을 드나들었으니까)가 칼국수를 비롯하여 갖가지 음식을 대며 “어여 와 밥상 머리에 앉아!”라며 나를 블러대는 말이 반갑다. 35년 긴 세월에도 친자매 같은 변함없는 친구!

 

음력 마지막 날에 뒤돌아보는 한 해도, 저 모든 세월도 사랑하고 사랑받은, 애오라지 감사드릴 은총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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