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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아무리 늙고 힘들어도 현역이 좋아!’
  • 전순란
  • 등록 2018-02-28 1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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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6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내가 저기 저 전등으로 하루 종일 힘을 빼려고 새벽부터 2층 천정에 고장 난 전등이 눈에 띄었나보다. 한번 생각하면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전순란. 빵고는 친구 만나러 나간다 하고 나는 어제 산 보스코 와이셔츠 소매를 줄이려 나갔다. 옷을 사도 문제는 언제나 팔길이. 재봉틀은 지리산에 있고 보스코의 배 둘레를 맞추려 105를 샀는데 소매를 10cm는 줄여야 한다.


보스코가 공직에 나갈 때 와이셔츠 다섯 벌을 맞추었는데 그때가 2003년. 15년을 입었다. 강연이나 많지 않은 공식석상에서나 입을 테니 죽을 때까지 그냥 입겠다지만 배가 나와 앞섶이 빵빵해졌고 소매나 목덜미가 누렇게 변색되어 삶아도 표백제에 담가도 때깔이 안 난다.



큰길가 수선집 할아버지한테 가져갔다. 연세는 83세이신데 젊어서 양복점 운영한 솜씨로 옷을 기막히게 수선해 주신다. 할아버지는 재봉질을 하고 할머니는 바짓단이나 치맛단을 새발뜨기로 꿰매신다. ‘그래도 하루에 오만 원 벌이는 되니까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두 늙은이 어렵지 않게 산다우’ 하시며 자긍심이 대단하시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어찌 때울까 눈뜨는 게 괴롭다는 나이에도 내 손을 움직여 일용할 내 양식을 구할 수 있으니 우린 복이 많아요’라고 하신다.


어제 왔던 실비아가 식당을 경영하며 날마다 손님들과 전쟁을 치루는 게 지겨워 ‘언제 그만둘까’ 노후설계를 하다가도 ‘내 몸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진 하겠다’고 작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식당 안쪽 손님들은 이 추위에도 덥다면서 에어컨 틀라 하고, 문간 쪽 손님들은 춥다며 난방기 틀라 하고… 신발장에서는 신발 없어졌다고 난리를 쳐서 반값을 물어 줬는데 나중에 CCTV를 보니 자기가 벗어 놓은 자기 신을 신으면서 억지를 부렸더란다. 저렇게 속이 썩어도 ‘현역이 좋다’는 슈퍼우먼이다. 보스코도 하루 열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집필을 하니 현역으로 쳐줄까? 



아들과 드리는 미사는 늘 흐뭇하고 경건하다



나 역시 ‘영원한 현역’이라 전구를 사오기로 전기재료 도매상엘 갔다. 한 구멍에 13와트짜리 전구 두 개씩 들어가니 전등마다 26와트고 마룻방 천정의 전등이 열개니 그 불을 다 켜면 시간당 260와트. 두남전기 사장님이 이참에 전기를 LED로 다 바꾸라고, 12와트짜리 10개면 되는데 웬 낭비냐 해서, 갈아 끼우는 작업은 누가 하나 고민하면서도 LED 전구를 한 자루 사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친구 만나러 나가다 친구 사무실에서 갑자기 회의가 잡혔다 하여 그냥 돌아왔다고 빵고가 집에 와 있지 않은가! ‘아, 이건 집안 전등을 바꾸라는 하늘의 계시다!’ 빵고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자기가 갈겠다고 나선다. 20여 년 전 차사장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천정 속으로 장치한 전등을 떼내고 새것으로 달기 시작하고 아래층 구총각까지 두꺼비집 앞에 세워두고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게 시키는데 새로 단 전등에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아무래도 직렬병행일 듯해서 어쩔 수 없이 전문가, 30년 넘게 우리집 전기를 봐주는 배사장님을 불렀다.



5시에나 오겠다는데 시끄러운 주변 소리로 보아 고스톱판이다. 하루 두 갑 줄 담배와 고스톱은 그의 인생에 단 두개의 낙이다. 담배를 피울 때는 집안 어디에나 닥치는 대로 재를 털고 공사를 하면서 꽁초는 꼭 자기 가방 속에다 비벼 끄는 게 주 특기였다. 그래서 공사 하던 집 어떤 사모님은 재떨이를 들고 따라 다녔다나. 부인은 남편의 금연이나 단도박은 일찌감치 포기하고서 구멍가게에서 담배와 전기용품을 팔면서 근근이 외동딸을 공부시켰다.


그래도 배사장님의 실력만은 최고여서 ‘한전에서도 절대 해결 못하는 일에는 나를 부른다’는 말씀은 허세가 아니다. 드디어 담배마저도 딸내미 성화에 끊었다는 게 오늘의 자랑이다. 그의 놀라운 손동작을 보니 빵고가 아마추어로 해낼 일이 아니었다. “신부님은 이런 거 못해 전문가인 내가 해야지 그저 책이나 많이 보고 사람들이나 잘 인도하셔요.” 


딸내미가 문빠여서 맨날 문재인 대통령얘기만 한다면서도 ‘어떤 놈이 그 자리에 있어도 다 해 먹게 마련이니 적폐청산은 그만 끝냈으면 좋겠다!’는 지론. “사장님, 태극기집회에 가요?” 물으니 “돈만 많이 주면 가지, 왜 안가요.” 요즘 김영철의 방남을 두고 통일대교까지 점거하고 벌이는 자유당의 작태라든가 나라가 곧 적화된다는 꼴보언론의 엄살은 경향만평 그대로 비웃음으로 넘기면 되지만 배사장님 수준의 노인들에게는 아직도 먹혀들어가는 수작인가 보다. 


다행히 그동안 내 머리를 썩히던 마룻방 전기공사가 오후 늦게 끝나고 우리집 이층 서재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배사장님이 나가고 10분 후에 대문에 초인종이 딸랑! 화투판에 가려는 일념으로 내달렸는데 등판이 서늘해 보니까 자기 점퍼를 우리집에 놓고 갔더란다! 그 집 아줌마, 머지않아 성녀품에 오르겠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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