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생일 기사를 가톨릭프레스 표제기사로 싣기란 사실 주저되는 일이다. 그러나 임피제 신부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훌륭한 사제의 아름다운 삶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은 우리가 만사를 제치고 서두를 일이다. 사제도 칭찬에 목마르고, 신자들은 애타게 훌륭한 사제를 알고 싶다.
임피제 신부(본명 패트릭 J. 맥그린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성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현장에서 함께 활동한다.’는 목표로 설립되었고, 우리나라에는 81년전 1933년 10월 29일 진출했다.
1928년 아일랜드 출생의 그는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1953년 25살 나이에 한국으로 왔다. 4·3 사건과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제주도에서 가난을 줄일 목적으로 성이시돌 목장을 만들고, 병원과 경로당, 요양원, 유치원, 청소년회관 등 복지시설을 설립했다.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으며, 1973년에는 제주도 명예도민이 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은 그에게 불쌍한 양떼가 사는 풀밭이었다. 착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버린다. 어떤 목자는 목장 땅을 지키기 위해 양떼를 버리고, 어떤 사제는 풀밭에서 골프공을 따르지만 말이다. 착한 목자에게서는 양 냄새가 난다.
임 신부는 사업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땅히 그럴 법하다. 제주에서 이시돌목장을 개척하였고, 각종 복지사업을 수십 년 꾸려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받은 상과 상패는 이름만 소개하기도 한참 걸린다. 그에 대한 각종 보도는 신문과 인터넷에 가득하다. 미담 일화는 골라 들어도 며칠 걸린다.
94년 어느 날, 나는 이시돌성당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벌써 21년 지났다. 66살 외국인신부의 어눌한 한국어 강론은 그러나 진국이었다. 정확한 단어에 깊은 의미가 전해지는 강론이었다. 그는 사업가 신부가 아니라 영성가였다. 첫 인상은 갈수록 더해졌다. 그는 사업가 이전에 영성가요, 사업가가 아니라 영성가다.
‘가난을 벗어나지 않으면 하느님께 다가설 수 없다’라는 그의 신념은 이시돌목장 사람들에게 가난에서 해방이라는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물질적 가난을 몸소 살고 있다. 그가 일구었던 속칭 사업은 그에게 가난의 기쁨을 앗아가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이라는 십자가에서 끌어내렸지만, 스스로 가난이라는 십자가를 졌다.
이른바 성공한 사업가 신부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인간적 교만이나 초라한 영성 같은 것은 그에게 없다. 돈이 주는 세속적 위력 같은 것을 그에게 느끼기는 어렵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다. 얼마 전 겨울 어느 날 방문했을 때, 그는 난방비를 아끼느라 보일러를 끄고 담요를 덮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부끄러웠다. 전날 나는 방이 더워 이불을 걷어차 감기에 걸렸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
생일을 하루 앞둔 오늘, 신부를 방문하고 인터뷰를 청하였다. 좋은 의도에서 나온 제안이지만 사절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다. 그리고 곧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참 이상하다. 훌륭한 인물들은 첫 마디가 다 똑같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선거에서 선출된 후 수락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첫 문장은 “저는 죄인입니다”pecator suum 였다. 칼 바르트와 칼 라너가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도 어쩜 그리 똑같을까.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제 영혼을 너그러이 받아주소서.” 죄 많은 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죄 적은 사람은 자기 가슴을 친다. 회개할 필요가 적은 사람은 반성에 바쁘고, 회개할 것이 많은 사람은 변명에 바쁘다.
“예수는 신부님께 어떤 분입니까?”라는 내 질문에 “저는 누구를 가르치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답하신다. 하수가 고수에게 물었으니, 당연히 우문현답이 온다. 내가 쓴 책 세권을 생일 선물로 드렸다. “애 많이 썼습니다.”라고 나를 위로하신다. “주님 축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이신다.
내년 생신에도, 내후년에도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십 번 더 채워주소서. 신부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