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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다시 만나야 할 우리!’
  • 전순란
  • 등록 2018-04-27 15: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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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6일 목요일, 맑음


“어떻게 알았대?” “정희할매가 노인정에서 알아다 줬제.” “그런데 수술도 안 되고 어째 손을 쓸 수가 없담서.” “살만큼 살았지 뭘. 퇴원해서 집에 갈라고.” “그래도 서울대병원엘 가봐. 응급실로 가면 수술해 줄지도 몰라. 병원엘 이리저리 다녀야 쬠만이라도 더 살 수 있어. 어쨌거나 내일 찾아갈게.”


얼마나 목소리가 큰지 전철 안 사람들 모두가 인상을 찌푸린다. 노인이 되면서 귀가 어두워지면 자기 음성도 잘 안 들리는지 무작정 목청이 커진다. 내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시라’는 신호를 보내고 귀를 막아보이자 전화소리가 좀 낮아진다. 울 엄마는 민폐를 안 끼치겠다면서 아예 누구한테도 말씀을 안 하시니까 그것만으로도 낙제점은 넘으신다.



이번엔 그 할매가 남의 눈치가 보이는지 문자를 보내겠다면서 내게 문자 보내는 법을 가르쳐 달란다. 다시 음성이 올라가 커다란 소리로 문자수업을 따라 하는데, 가르치는 나까지 눈치가 보인다. 연습 삼아 자꾸 딸 이름으로 문자를 보내자, 이번엔 딸이 짜증을 낸다. ‘어머님께서 문자 보내기 수업 받는 중’이라는 내 문자에 딸은 아예 전화를 꺼버린다.


성신여대 앞에서 그 할매가 내리자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가 내 곁에 앉으며 "품위 있게 늙어야 아름다워요."라고 한 마디. 곧이어 자기의 허스토리를 풀어낸다. 자식들 따라 뉴질랜드에 간지 20년인데 그림을 그린단다. 내 귀에 속삭이듯 간지럽게 얘기를 들려주는 품이 참 교양 있다 싶은데 어투에 담긴 맘씨는 좀 그랬다. 먼저 내린 할매가 순수한 토종 음식이라면 이 할매는 퓨전음식이랄까? 어떻든 나도 늙어가며 할매들의 다듬어지지 않는 모습도 봐줄 여유가 생긴다.


공안과 선생님은 ‘이젠 수술한 안구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됐으니 다음 주 5월 1일에 와서 마지막 검사를 받으라. 그 다음은 2주후에 오라’는 진찰. 긴장됐던 시간이 다 흐르고 이젠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농사지으면서는 눈 조심을 잘하라는 당부.


보스코가 일이 바쁘다면서 함께 나가기를 꺼려해 야채죽을 끓여 상을 차려주고서 나는 ‘하누소’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조체칠리아, 오실비아, 정아네스가 왔다. 실비아와 모자 체칠리아는 서로 구면이지만 정데레사는 자기들끼리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셋 다 가톨릭신자에다 정치적 시각이 같아선지 쉽게 마음이 통했다. 요즘에는 시국관이 다르면 아예 말 섞기를 포기하는 세상이다.




체칠리아는 식사 후 곧 일하러 갔고 실비아와 아녜스는 우리 집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어제 만든 사과 파이를 먹으며 환담했다. 내일 있을 남북회담 얘기에 이르자 다들 걱정과 기대로 한마음을 나타낸다. 


문병란 시인의 ‘직녀에게’처럼,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라는 소원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같으리라고 본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전 세계가 축원하는 이 만남에 홍준표를 앞세운 집단만이 여전히 고춧가루를 뿌리며 저주를 보내고 있으니… 




날씨도 좋고 걷기에도 알맞은 오후라 우리 세 여자는 산보에 나섰다. 덕성여대 교내를 통과해 먼저 ‘솔밭’으로 갔다. 건영건설로부터 이 공원을 지켜 시민들이 행복한 오후를 보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이 공원에 올 때마다 나는 참 뿌듯하다. 


올해는 ‘4·19 민주공원’도 못가고 4월을 보내나 아쉬웠는데 두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거기까지 갔다. 묘역에 누워계신 분들을 기리고 ‘내일 남북회담 성공에 당신들의 도움이 꼭 필요 합니다’는 부탁도 드렸다.




여자들은 함께 걸으며 서로의 아픔, 남에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처를 내보이는 일 자체가 서로에게 위안과 치유가 된다. 나와 너가 다를 바 없는 창조물로서,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어미들’로서 우리가 낳은 아이들을 믿어줘야 한다고, 하느님이 인간들을 믿어주시듯이 우리 자식들을 끝까지 믿어줘야 한다고 매듭을 지었다. 당신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고통까지 겪어보신 하느님께서 이 부활시기에 우리 어미들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일러주신다. ‘상처 입은 조개만 진주를 품을 자격이 있단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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