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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그 거친 세월에도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 전순란
  • 등록 2018-05-04 10: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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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3일 목요일, 찬바람 불고 맑다가 소나기 쏟아지다


바람, 바람, 바람, 거센 바람이 나무 가지를 거칠게 쓸며 언덕 위로 내 달린다. 밭가에 풀이라도 뽑으려 논둑에 나왔던 유영감님이 휘청이며 언덕 아래로 불려 내려간다. 지난겨울 방안에서 편히 쉬셨다지만 ‘농부는 일을 안 하면 망가져…’ 하시던 말대로, 그분 손에 들린 낫에 베어져 떨어지는 소리쟁이처럼 힘이 없다. 강풍으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드러나는 다리가 앙상하여 아내가 떠나고 혼자 남겨진 남자의 곤고한 삶을 보여준다.


“면사무소에 사모님이 뭐라 일렀소? 작년에 몇 번 가져오다 그만두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댓 번을 해와 싸서.” 독거노인을 위한 음식봉사 얘기다. ‘뭘 해오던가요?’ 물으니 고추조림, 감자볶음, 어묵, 멸치, 생선구이… 김치는 기본이고 국은 매일 바꿔 해온다니 혼자 사는 남자 반찬 걱정은 덜었단다. 작년 휴천재에 있을 때는 음식준비 하는 끝에 좀 더 해서 나눠 드리곤 했는데 요즘 서울을 가서는 통 못 내려오느라 당신이 걱정돼서 내가 주선을 해준 줄로 알았단다.




“아저씨가 문재인을 뽑은 줄 대통령이 알고 고마워서 보냈을 거예요.”라고 했더니 “어데!” 라며 활짝 웃는다. “내가 문재인 젊었을 때부터 잘 알아. 나 공장 다닐 때 노조했는데 그때 많이 도와줘서 고마웠어. 착하고 반듯한 사람이야 내 걱정은 말어!” 작년에 ‘우리 이니 한 표 찍어 달라’는 내 부탁에 그분이 했던 대답이었다.


오늘은 마파람에 일을 못하겠다며 땅이나 팔아 달란다. 300평이니 7~8천은 되는 돈이니 ‘일도 하기 싫고 힘도 부쳐 그 돈 갖고 죽기 전에 놀러나 다녀야겠다’는 말씀. 농부가 농사를 포기하는 건 가정주부가 가사노동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엄마가 둘째 며느리를 얻으며 선언하셨다. “나는 오늘부터 절대 부엌엔 안 들어간다!” 그 선언을 꼬박 지키셨는데 그때부터 엄마의 노화는 급진전했다. 호천이가 “누나, 나이가 몇이야? 엄마는 그 나이에 밥 안 차려 드리면 안 드셨어. 누나도 손님도 줄이고 농사도 줄이고 좀 편하게 살아!” 잔소리를 하다 “하기야, 그것도 안하면 시골에서 뭔 재미로 살겠어? 그럼 일 많이 해, 실컷!” 이라고 정반대로 결론을 짓는다.




어제 함양장에서 모종을 사다 놓았는데 너무 바람이 세차고 날이 추워 내일 심기로 미뤘다. 심순화 화백이 조각하여 마재성지에 설치한 성모상(원죄없으신 성모)의 미니어처를 닷새 전에 선물 받아 오늘 휴천재 층계참에 모셨다. 이 집에 오는 이들을 오래오래 지켜주실 분이다. 


5시에 원지에서 미루네와 봉재 언니랑 저녁식사를 당겨 먹고 산청 성심원 제7회 ‘성심 어울림축제’에 참석하러 갔다. 남해 파스칼 형부네는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친지들을 두 주간이나 모시고 나서도 오늘은 이웃들을 모시고 산청까지 왔다. 올해는 평화방송이 개국 30년을 맞아 전국을 찾아 돌며 ‘평화나눔 음악제’를 하는데 그 제1차 행사로 성심원에서 음악회를 연다고 했다.



1959년 프란치스칸 수사님들이 30명의 나환우와 쪽배를 타고 건너와 시작한 토굴살이. 인근주민의 질시로 낮에는 산으로 숨어 들어가고 밤에는 숲에서 나와 돼지치고 닭쳐서 알 받던 1세대 노인들은 거의 사라져 가고 100여명이 남아 있다. 오상선 신부님이 10여년 전 성심원으로 부임하면서 성심원 입주자들이 주민들에게 당했던 마음의 상처와 소외를 어떻게 좁힐까 구상한 게 지역 주민들을 초대해 열어온 ‘어울림 축제’였다.


오늘은 오신부님이 ‘나사’(가톨릭나환자사업회) 회장의 신분으로, 먼 길을 와서 축사만 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분이 이곳을 떠난지 반년만인데 오늘은 인사도 못나눴다. 10여년 혼신을 기울인 장소와 사업과 사람들을 두고 홀연히 떠나는 무심함이 가톨릭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멋이다.




소프라노 임선혜의 노래와 사회, 퀸텟의 실내악 연주, 고봉인의 첼로 독주, 특히 해금병창 춘향전 ‘사랑가’는 일품이었다. 이 산속에서 고급스런 문화생활도 하고 지인들을 만나 행복했지만, 성심원 촌장으로 참석자들에게 인사한 나환우의 응어리진 말마디가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에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태풍이 지난 자리에도 꽃이 피고, 지진이 난 자리에도 샘이 솟듯이, 그 거친 세월에도 우리는 다시 살아남았습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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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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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8-05-05 21:23:09

    전순란선생님의 글을 그동안 읽기만 하다가-해방신학 포함- 결심을 하고 글을 씁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정신을 담고 계셔서 부럽습니다. 성염박사님도. 저도 가톨릭신자이지만 아주 긴 세월 냉담중이라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는 뭐하지만, 오늘 제가 글을 쓰게 하신 말씀. 마지막 한인센병 환우(?)분들의 “태풍이 지난 자리에도 꽃이 피고, 지진이 난 자리에도 샘이 솟듯이, 그 거친 세월에도 우리는 다시 살아남았습니다…” 60줄에 접어들면서 20대때 나자로마을로 봉사활동 갔던 생각이 납니다. 이제 선생님의 글을 읽지 않으면 허전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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