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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아가 냄새, 아가 살결, 아가 미소
  • 전순란
  • 등록 2018-05-14 10: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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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2일 토요일, 흐리고 비


아랫집에 새 생명이 왔는데 소리가 없다. 애가 있으면 왠지 수선스럽고 응애응애 울고 떼쓰고 달래고 참다못한 애아빠가 소리도 한번쯤 지르는데? 천사 같은 아가는 목욕하고서 엄마젖을 실컷 먹고 8시경 잠들면 새벽 4시쯤 기저귀 갈아달라고 부스럭거리다 8시까지 내처 자고는 아침에 일어나 엄마를 보고 빵긋 웃는단다. ‘이게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요망 사항이지 어찌 현실에서 가능할까?’만 ‘한빈’이가 바로 그렇다.


아침에 휴천재 마당에 ‘한빈이’처럼 귀여운 파랑새가 날아와 앉았다



오후에 우리가 읍에서 돌아온 길에 아가 방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누워서 놀다가 눈이 마주치자 빵끗 웃는다. 천사의 미소다. 우리가 마지막 맡은 아가 냄새, 아가 살결, 아가 미소는 벌써 여러 해 전이다. 처음은 12년 전 로마 대사관저에 큰손주 시우가 처음 오던 해. 할아버지를 좋아하여(아가들도 직감적으로 착한 사람을 알아낸다) 테라스의 천의자에 누운 보스코의 배 위에 엎디어 쌕쌕 잠을 잤다. 편히 자는 아이보다 더 행복해 하던 할아버지!


그게 보스코인데 이젠 그 꿈결 같은 시간은 작은손주를 거쳐서도 물결 따라 흘러가 버렸다. 시간은 가고 행복은 짧게 남는다. 오늘도 비 내리는 상림 숲길을 거닐면서 주름진 보스크의 얼굴을 보니 손주 생각은 접고 남아있는 시간(‘남은 날은 적지만’) 저 남자에게라도 잘해줘야지 그렇지 않았다간 후회할 날이 곧 올 듯하다.




12시에 엄엘리가 함양에 내려온다는 연락이 왔다. 전에는 그니가 온다면 무슨 일일까 궁금했는데 이제는 맘 편히 맞을 수 있으니 요즘의 시국이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더 없이 평온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북한과도 평화협정을 가까이 두고 반공법도 필요 없고, ‘고무찬양’이니 ‘빨갱이’니 ‘내란선동’이니 하는 말도 필요가 없어졌다. 요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는 문아무개 칭찬과 자랑으로, 홍아무개 흉보기로 흥겹기만 하다.


샤브향에서 엘리와 점심을 먹고 비오는 상림숲을 우산을 받고 거닐며 얼마나 깔깔거렸는지 보스코가 우리 둘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상림의 주차장 앞에는 빗속에서도 ‘강소농’ 회원들의 토요장터가 나름대로 해온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다들 나와 아는 얼굴들이라 지갑을 열어야 뒤통수가 뜨거워지지 않는다. 시골 살면 현금이 제일 아쉽다. 어디서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막일을 나가 일당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어서 애들 학교 갈 때 준비물 값이라도 들려 보내려면 천막 앞을 지날 맘씨 좋은 아저씨 꼬불쳐 놓은 비상금이라도 뽑아내야 한다.


엄엘리는 자연에 대한 흥미도 대단해서 상림숲을 거닐며 ‘다음’에게 꽃이름과 나무이름도 물어보며 둘이서 한참 즐거웠다. 쪽동백의 별같이 하얗고 귀여운 꽃이며. 층층나무의 거창한 우주정거장 같은 꽃, 금방이라도 하얀밥을 고봉으로 담아줄 듯한 이팝나무… 배고픈 시절엔 저나무의 꽃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성남에서 트래픽을 뚫고 함양까지 내려왔을 길이므로 온 길만큼 돌아가야 하기에 ‘콩꼬물’에서 커피한잔을 하고 엄멜리를 돌려보냈다. 보고 싶다며 수백 리를 달려와 밥 한 끼 먹고 ‘또 올 게요’라며 쉬이 오갈 사람이 있어 우리 인생이 마냥 풍요롭다. 


함양군수 선거에 기호1번으로 나온 ‘서필상’ 후보 사무실 개소식에 갔다. 함양에서는 군수만 되면 군청이 아닌 교도소로 가서 임기를 마치므로 이번만은 우리 대통령을 본받아 정직하고 겸손한 인물이 되길 바란다. 


사무실에 가보니 함양에서 내가 평소에 ‘좋은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죄다 와 있었다. ‘서필상’ 후보는 잘 모르지만 주변 사람으로 미루어 좋은 인물 같다. 하객이 너무 많아 후보와는 인사도 못 나누고, 보스코는 이발소로 나는 마켓으로 갔다. 남편이 정치하겠다는 말 않는 것만으로도 ‘내 팔자 상팔자’라고 하는 부인네들 많을 요즘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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