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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소시민 무니라의 파란(波瀾)
  • 김혜경
  • 등록 2018-06-18 11:18:26
  • 수정 2018-08-03 16: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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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말로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유월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꿈같다. 드디어 평화를 향해 제대로 방향을 잡은 느낌이다. 잘하면 이번 생에 기차타고 유럽까지 갈수 있을지 모른다. 어쩐지, 멀다고 하면… 안 될 것 같다.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누구들일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떠오른 『피의 꽃잎들』. 아프리카 케냐의 영국 식민지배(1895-1963)와 무장독립투쟁 그리고 독립 후 신식민주의 등의 현대사를 범죄소설 형식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박경리문학상(2016년)을 받기도 한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시옹오의 아들 응구기라는 뜻으로 단번에 뉘집 자식인지 알 수 있는 케냐식 이름이다. 


▲ 박경리문학상(2016년)을 받기도 한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


케냐 역시 식민통치에 빌붙었던 소수의 흑인들이 독립 후에도 기득권을 거머쥐었고 이들은 자본을 동원해 수많은 흑인 동족을 수탈해 더 큰 권력과 자본을 끌어 모았다. 무장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영웅이 권력을 잡자 되레 민중을 억압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독립을 경험한 우리와 어쩌면 이리도 판박이인지. 슬픈 데자뷰다.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비단 케냐 한 곳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일깨운다.


응구기는 이런 사회와 정치판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고 그 때문에 수감생활도 했다. 이후 자신을 살해하려는 모이 독재정권을 피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지금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케냐의 시골마을 일모로그에서는 오래전부터 칼 따위의 쇠붙이로 된 도구는 영적인 힘을 가진 음와시 와 무고의 집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 “풀무와 망치를 사용해 쇠를 두드리고 구부리려면 사악하고 질투 어린 눈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했기 때문이다.”(p.44) 언제 씨를 뿌릴지,언제 가축을 이동시킬지도 음와시의 결정에 따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으면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며 사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독립 후 일모로그는 권력을 꿰찬 도시의 정치가와 자본가들의 농간으로 개발광풍에 휩싸인다. 나고 자란 마을을 오래도록 지키며 살아온 까막눈 노인들에게 법이며 서류들을 들이대며 땅을 빼앗고는 빈민가로 내몰아버린다. 


이런 와중에 거물 사업가인 키메리아와 교육자이면서 잘 나가는 사업가였던 추이와 음지고 가 창녀인 완자의 집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불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무니라와 압둘라, 카레가 세 사람이 체포되고 심문받으면서 살인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이 과정을 통해 등장인물 사이에 얽히고설킨 개인사와 더불어 이들의 이야기가 케냐의 아픈 역사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무니라는 살해당한 셋 중 하나인 추이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영리하고 야망이 컸던 추이와 달리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추이가 주도한 학교의 파업에 동참했다가 학교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무니라의 아버지는 부유한 지주에다 교회 장로였지만 차갑고 인색한 사람이었다. 농장 일꾼들이 모임을 만들려 하거나 무슨 문제라도 제기할라치면 가차 없이 해고해버렸다. 신앙심을 농장 경영에 이용하는 아버지도 그렇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에 별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하는 형제들도 못마땅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신앙에 비춰볼 때 어쩐지 비양심적인 것 같았던 거다.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일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여동생 무카미가 자살하자 일모로그에 교사로 자원했다. 


압둘라는 원래 무장독립투쟁단체인 무이무이의 멤버였다. 총과 칼은 물론이고 바람의 방향을 읽으면서 한꺼번에 영양 두 마리를 새총으로 잡는 용감무쌍한 아프리카의 전사였다. 그러나 단체를 배신한 키메리아 때문에 동지였던 응딩구리는 교수형을 당했고 자신은 한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간신히 도망쳤다. 목숨 걸고 투쟁하다 다쳤고 도망자 신세가 된 그였지만 절름발이라며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던 조그만 땅을 팔아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는 일모로그로 숨어들었다. 쓰레기를 주워 먹던 거지아이 조지프를 심부름꾼삼아 소금이나 설탕 따위를 파는 잡화점을 열고 술도 팔면서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


열혈청년 카레가는 무니라네 농장 일꾼이던 마리아무의 아들인데, 압둘라와 함께 실탄을 넘겨받다 잡혀 교수형에 처해졌던 응딩구리의 동생이다. 카레가는 무니라의 제자였고 그의 죽은 여동생 무카미의 남자친구였다. 농장 일을 열심히 해 학교에 들어갔지만 군대처럼 획일적으로 운영하는 교장을 반대해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이 성공하고 영웅으로 추앙받던 추이가 새로운 교장으로 왔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추이는 물러난 교장에 한술 더 떠 교내에 폭동진압대를 불러들였고 폭력진압으로 학생들의 뼈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으스러지기도 했다.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난 카레가는 불행히도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취직하려면 높은 사람 누군가를 알아야 한다는 거다. 투쟁에 승리하고도 길거리에 나앉아 물건을 팔고 동정을 구걸해야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무니라에게 조언을 구하러 일모로그를 찾아왔던 그는 노동운동가로 거듭난다.


▲ 1950년대, 마우마우 봉기에 참여한 케냐인들이 영국군에게 감시 당하고 있다. (사진출처=The Telegraph)


마지막으로 용의선상에서 벗어나 있지만 중요한 인물인 완자. 초등학생이었을 때 옆집 살던 키메리아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그는 도움을 청하는 완자를 외면하고 비웃었다. 또 압둘라와 응딩구리를 배신해 죽음으로 내몰았고, 비상사태말기에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넘어온 사업권을 수완 좋게 따낸 영악한 사업가다. 완자는 아기를 화장실에 버리고 술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일모로그에 있는 할머니 응야키뉴아에게로 왔다. 배움에 목말랐던 그녀는 압둘라에게 조지프를 학교에 보내도록 했고 일모로그의 전통주인 셍게타를 만들어 팔아 압둘라와 큰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땅이 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자 모아둔 재산을 털어 땅을 되찾은 후, 마을 외곽에 성매매업소를 짓고 돈벌이에 몰두한다.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맨 처음 자신을 망친 키메리아에게 복수하려 한다.


과연 이들 중 누가 범인이었을까? 사실 불이 나기 조금 전 키메리아는 완자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불을 지른 사람은 압둘라도 아니고 카레가도 아니었다. 범인은 무니라였다. 소심한데다 완자 때문에 카레가를 질투할 때는 찌질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의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무니라는 정치나 권력, 자본에는 무심했지만, 여러 차례 신앙을 바탕으로 한 도덕의 순수성을 주장하곤 했다. 평소에 자신이 말했다고 해서 어느 순간, 해야 할 일을 결심하고 정말로 실천에 옮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시민이었던 무니라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생각이 많았을까. 아마 신앙인이어서 더 고뇌가 깊었을 게다.


▲ 지난해 12월 3일 제6차 촛불집회 때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 ⓒ 가톨릭프레스 DB


그러고 보면 추운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 진심으로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이들, 낡은 보수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투표로 파란을 일으킨 이들. 이들은 바로 수많은 무니라들이었다. 뛰어난 전사와 용맹한 투사도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묵은 판을 새로운 판으로 완전히 뒤바꿀 정도의 확실한 변화는 특정한 단체나 몇몇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제 분명히 알겠다. 실제적인 변혁, 커다란 진일보는 그저 그런 개개인들이 도덕적인 순수성으로 오래오래 고심하고, 결단을 내린 후, 용기를 내어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비상사태 : 키쿠유족이 1950년대 마우마우 무장투쟁을 전개하자, 당시 케냐를 식민통치하던 영국은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봉기를 무력으로 제압, 가담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가혹 행위를 자행했다.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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