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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늙은 수사님 기도하시다가 도로롱도로롱 주무시는…’
  • 전순란
  • 등록 2018-06-29 1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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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0일 목요일, 비온 뒤 흐림


아무래도 말을 해주고 싶어 못 기다리고 보스코가 기어이 내 아침잠을 깨운다(자정이 넘어 잠들고 나는 6시쯤 눈을 뜬다). 4시가 좀 넘은 시간. “여보, 우리가 독일을 이겼어. 그것도 2대 빵으로!” 나는 심심해서 나를 깨우려는가 싶어 “이겼다구요? 모든 건 가능하죠. 당신 좋겠수.” 라고 돌아눕다가 “어? 우리 축구가 이겼다고?” 하며 정신이 번쩍 나서 핸폰을 집어 든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스포츠엔 관심이 적고 밤잠을 설치며 응원할 열성도 없다.


그래도 우리나라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속이 상했다. 이번 월드컵은 우리 팀이 자정에 하는 경기여서 밤새우는 경기 시청은 단념하고 유투브에서 중요장면을 확인하고는 ‘잘 좀 하지!’라며 안타까워하던 참이다. 하지만 얄미운 건 우리 팀이 졌다고 온갖 악담을 퍼 붓는 댓글작자들. ‘한번 승패는 병가상사(兵家常事)’요 ‘누구는 지고 싶어지나?’ 군대문화가 가져온, 강자만 살아남는 살벌한 의식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지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고 못나기도 해도 인정받는 여유 있는 문화였으면 좋겠다.




이른 아침에 바오로 수도원 황인수 관구장 신부님이 올린 글. “기도를 드리러 성당엘 들어가는데/ 뒤편 의자에 앉아계시던 늙은 수사님/ 기도하시다가 도로롱도로롱 주무시고 계신다./ 행여 잠 깰세라 발끝으로 조심조심 자리로 돌아간다./ 우리 하느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다…


우리도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성탄 전야미사, 부활 전야 미사는 자주 책바오로 수녀님들께 갔는데 큰애 빵기는 내리덮히는 눈꺼풀과 처절한 싸움을 했지만 작은아들 빵고는 아예 장궤틀 아래서 엄마가 깔아준 옷 위에서 콜콜 잠들었다(우리의 유학시절 바티칸 대성당 교황님 미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사 후 수녀원 밤잔치에서야 깨어나 오락행사에 신이 났었다.


비가 쏟아지고 나자 물기 없이 메마른 땅에서 말라 죽지 못해 웅크리던 생명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들고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운다. 비가 좀 뜸해진 틈에 텃밭에서 도깨비방망이와 개비름을 뽑다가 모기와 깔따구에 쫓겨 올라왔다. 보스코도 점심 후 지줏대에 미처 묶어주지 못한 토마토를 손봐주러 반바지차림에 내려갔다 깔따구에 여나믄방을 물리고 도망쳐왔다. 저 잡초들과 물것들은 서로 공생관계 아닐까? 긴 여름의 시작인데 ‘그래 어디 한번 겨뤄보자!’




오후 3시쯤 식당채에서 책을 보는데 누군가 창밖에서 들여다본다. 7, 8년 전 어느 일요일. 어느 부부가 불쑥 휴천재를 찾아왔었다. 보스코가 그 무렵 마산주보에 연재하던 글을 읽고 우리를 보고 싶었단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뭔가를 함께 먹었는데 그게 '라사냐'였다는 기억까지 체칠리아씨는 간직하고 있었다. 경상대병원에 근무하시던 남편은 ‘프란체스코 제3회’ 회장님이기도 해서 ‘제3회’의 한국진출 70주년 행사에 보스코를 초대하여 (장익 주교님이랑) 정동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 인연이다. 누군가를 만나보고 싶으면 초면이라도 직접 찾아나서는 그니의 적극성에 탄복했었다.


오늘은 마산교구 가톨릭농민회 회원 몇이 지도신부님과 함께 블루베리 수확에 한참 고생하는 농민회원 집에 격려차 찾아온 길에 함께 들른 참이었다. 마산교구 농민회 회장을 지낸 진이아빠를 방문한 길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요다음 마산엘 가면 미리 연락해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아쉽게 헤어졌지만 ‘휴천재일기’로 나날을 나누는 사이라니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조카 수녀 에스텔이 양재학원에서 실습으로 만든 옷가지를 보내왔다. 보스코의 여름 바지도 만들어 보내줬다. 보스코는 내 옷을 ‘수녀 스타일’이라고 놀리지만 나 하나만을 위해 누가 옷을 지었다는 정성만으로도 뽐내며 입을 만하다. 감이 두꺼워 봄가을에 입어야겠다.


우리 작은손주가 방학을 앞두고 음악반 친구들과 함께 공연한 사진이 보내져왔다. 그 작은 생명이 제법 자라서 자기 자리를 만들고, 악기를 써서 소리를 낼 줄 안다는 사실이 할미의 눈엔 서글프도록 기특하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손주라는 존재 자체로 아름답고 저 생명이 우리핏줄을 찾아온 그 일만으로도 고마운 아이들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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