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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예수님도 난민으로 인생을 시작하셨다!”는 강주교님 호소
  • 전순란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8-07-04 15:42:45
  • 수정 2018-07-04 15: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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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3일 화요일, 하루 종일 비



휴천재 식당채 목조주택 지붕위로 하루 종일 내리는 빗소리는 엄마가 가슴을 또닥이며 자장가라도 불러주는 기분이다. 책을 읽다가 내일 찾아온다는 친구의 점심을 마련하려면 아무래도 식재료를 마련해야 돼서 유림 건너 화계에 있는 부식가게라도 가야할 것 같았다. 


유림 화계에 있는 단골 부식가게 아줌마의 건강이 몇 달 전부터 걱정스럽던 차였다. 오래전부터 중한 병이나 속병을 마냥 견디는 느낌을 주었다. 아줌마가 어떤가 몇 번 들렀는데 아저씨만 가게를 지키고, ‘아줌마한테 무슨 일 있어요?’ 물어도 ‘어데예. 잘 있습니다.’라고 말을 끊는 품이 아무래도 수상했었다.


오늘은 물건을 사고서 작심하고 물었다. “아저씨, 아줌마 먼 길 떠나셨죠,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그제야 “네, 지난 4월에 가버렸네요.”라고 한다. 아저씨는 눈길을 떨구고 내 뺨 위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게는 유난히 살가워서 꼭 깎아주거나 채소의 양념거리를 찾아 얹어주거나 호의를 베풀었고 간간이 가정사도 들려주었다. 20년 넘는 우리 인연이 그렇게 끝나다니…


그니는 정말 일을 많이 했다. ‘일년 365일 단 하루도 쉬어본 일이 없다’고 한탄했다. 새벽 다섯 시부터 밤늦게까지, 중간중간 손님이 뜸할 때는 논이나 밭으로 내달리고, 장사하며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치다꺼리 하고 남들이 8, 90년에 할 일을 60여 년에 다 해 치우고 그렇게 살다 갔다, ‘인생 총량의 법칙’대로, 소처럼, 종처럼,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일하다 갔다. 



그니가 늘 서서 손님이 멀어질 때까지 바래주던 그 자리에 아저씨가 입 꾹 다물고 서 있는데도, 더는 바라볼 수가 없어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섰다. 다시는 그 가게에 못 갈 것 같다.


오다가 ‘지리산 새송이 버섯 공장’에 들렸다. 평소 비품 버섯을 팔던, 사장님의 처형은 쉬러 가고, 진주에서 왔다는, 같이 일하는 동남아 새댁들처럼 겁나게시리 눈을 수술한 아가씨가 5000원 어치 새송이를 푸짐하게 담아준다. 열댓 명 되는 젊은 여자들이 모두 이주여성들이다.



제주에 온 ‘예맨 난민’들이 전쟁에 쫓기어 이 땅에 들어왔다면, 저 여인들도 가난에 쫓겨 우리에게 왔다. 다른 게 있다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더 이상 돌봐주지 않는 남자들의 아내가 되어 그 남자들의 아이를 낳아주고 살림해주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진 여인들이다. 주변에서 보더라도, 도시에 안 나가고 농사만 짓다가 혼기를 놓친 남자들을 저 여인들이 구제해 주었다.


집안건사 다하고, 시부모 모시고, 낮에 애들 유아원이나 학교 간 사이에, 이렇게 일하고 돈 벌러 나왔다. 여자가 저렇게 나서지 않으면 앞가림을 못하는 남편들도 쌨다. 시골에 있는 많은 공장들이나 축사가 동남아인들 아니면 일꾼도 놉도 구할 수 없다. 시골에서 돌아가는 소위 ‘3D’(Danger, Difficulty, Dirty로 기피 업종을 의미) 작업장에서는 사람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는데도 이주민에 대한, 난민에 대한 혐오는 왜 그렇게 심한지…


우리 큰아들은 연중 3, 4개월은 전 세계 난민(4000만이란다)을 찾아다니며 난민캠프에서 살다시피 한다. 빵기가 어제 <연합뉴스>에 난민문제 인터뷰를 가졌다.


난민 어린이 얘기를 늘 듣고 자라던 큰손주 시아. 네 식구가 9평 아파트에서 살다 시청의 배려로 몇 해 전 25평 아파트로 옮겨가던 날, 시아의 첫 마디가 이렇더란다. “아빠, 이젠 집이 넓어졌으니 부모 잃고 거리에 사는 불쌍한 아이들 걱정 말고 다 데려 오세요.” 



작은아들이 이시돌 목장 안에 지금 마악 시작하는 청소년 보호시설 ‘숨비 소리’에도 예멘 난민 아이들을 몇 명 받고 싶은데 국가지원시설인데다 살 우리나라 아이들과의 관계 등으로 아직은 마음가는대로 실시 못하는 게 안타깝단다. 


요즘 ‘난민수용반대’ 데모를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태극기집회나 그 밖의 극우집회에 나오던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단다. 제주에서는 개신교가 ‘대한민국의 이슬람화’를 우려한다면서 저 반대에 앞장선단다. 개신교 신자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교육받았기에 저럴까? 아랍의 저 모든 전쟁은 사실상 그리스도교 세계가 일으키는 학살인데…


다행히 김희중 대주교님이 의장으로 있는 ‘4대 종단’이 ‘제주 예멘 난민 문제에 관한 호소문’을 발표했고,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님은 6월 29일 교황주일에 “예수님도 난민으로 인생을 시작하셨다.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배척과 외면은 인간이 지녀야할 최소한의 도리를 거부하는 범죄”라고 질타하셨다. 


우리 양심을 일깨우는 사진들


▲ 제주 4·3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의 한 장면.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의 주검과 생전모습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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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총 1 개)
  • kimsubok212018-07-06 11:53:26

    김수복입니다. 감동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난민 어린이 얘기를 늘 듣고 자라던 큰손주 시아. 네 식구가 9평 아파트에서 살다 시청의 배려로 몇 해 전 25평 아파트로 옮겨가던 날, 시아의 첫 마디가 이렇더란다. “아빠, 이젠 집이 넓어졌으니 부모 잃고 거리에 사는 불쌍한 아이들 걱정 말고 다 데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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