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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저 아재, 아내가 자리에 누워있거나 애처가이거나 홀아비겠다’
  • 전순란
  • 등록 2018-07-09 10: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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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7일 토요일, 맑음


모처럼 해가 난다. 시원한 바람마저 열린 창문으로 넘나들며 그동안 눅눅하던 집안을 뽀송하게 해준다. 아래층 구총각방은 장마철이면 너무 습해서 먼저 라총각은 제습기를 사서 사용했었다. 구총각은 학생이어서 경제 사정이 좀 빡빡할듯하여 말은 안 했다. 여행을 갔는데 아직 안 오고 방문을 닫아놓았기에 바닥이 끈적끈적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 내가 창문을 열고 보일러를 좀 돌렸더니 바닥이 뽀송해진다. 


겨울 이불을 아직도 덮고 있는데 자기 앞은 스스로 건사한다며 엄마가 찾아오는 것도 꺼리는 듯해서 곁에서 보는 내가 딱하다.



12시에 정릉으로 이엘리가 왔고 한목사가 우리에게 몸보신시켜준다며 유황오리를 냈다. 가난한 목사님이 내는 점심이라 감지덕지 먹었더니만 고기 먹고서도 내 위장에 뒷탈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리고기가 ‘목사님의 영빨’을 받았나 보다. 셋이서 먹고 남은 고기는 한목사가 싸가고, 남은 죽은 내일 엄마한테 갖다드린다며 내가 챙겼다. 한목사 집에 가서 커피와 수박을 먹고서 수박 반통도 준다기에 엄마한테 갖다 드리기로 들고 나왔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작은 교회라는 어느 교회당 수리 중



여러 번 정릉 한목사 집엘 갔으면서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을 구경 못 했는데 오늘은 맘먹고 정릉을 둘러보고 그 뒤로 한 바퀴 도는 산책길을 걸었다. 예전에 북악스카이웨이로 달리던 길에 ‘저 담 넘어가 대체 누구네 정원이기에 철망까지 쳐진 넓은 녹지인가?’ 궁금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바로 정릉이었다.




다섯 시쯤 헤어져 이엘리는 ‘애들 넷’(사위까지)이 기다리는 큰딸네 집으로 갔고, 나는 우리 본당 6시 미사를 드리러 우이동 경전철을 탔다. 우이 솔밭공원 역에 내렸는데 길건너로 가는 구내 층계를 내려가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헝겁가방 속에 ‘CJ미역국’과 ‘소고기된장아욱국’이 들어있어 ‘저 아재, 아내가 아파서 자리에 누워있거나 애처가이거나 홀아비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남자 뒷모습과 체크무늬 남방에 눈이 가며 “오빠!”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진짜 오빠가 뒤돌아본다! 


건너편에 자전거를 두고 출근해서 가지러 간단다. 오빠가 건너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걸 본 오빠는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로 목숨 걸고 달려왔다! “오빠, 위험해!”


“왜 안가고 거기 서 있니?” “응, 오빠 기다리는 거야.” 오빠는 가방 속에 담긴 국상자를 쳐다보는 내 눈길을 의식하고는 “이 미역국, 아욱국 끝내줘. 대기업에서 200명이 넘는 머리 좋은 놈들이 만든 거라 웬만한 여자들은 흉내도 못 내. 제일 중요한건 1600원밖에 안하고 하나 사면 두 끼나 먹을 수 있어…” 울컥 내 목구멍에서 뭔가 올라온다.



“오빠, 혼자 먹자고 수박은 못 사지? 이 수박 가져가. 유황오리 죽도 저녁에 데워 먹어. 내 친구들이랑 국자로 떠먹었으니 괜찮아.” “숟갈로 퍼 먹었어도 암치도 않아, 얘. 옛날엔 식구들이 한 냄비에서 함께 퍼먹었고, 남은 건 쉴 때까지 다 먹었잖니?” 저녁꺼리 생겼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 오빠다.


저녁 늦게 오빠가 전화를 해왔다. 내일 우리가 미리내에 계시는 엄마한테 가는 길에 우리 차로 함께 가겠다고, 주말이라 별로 할일도 없고, 돌아 올 때는 대중교통으로 오겠단다. 다른 때 같으면 오빠가 ‘태그끼아재다운’ 얘기를 길게 늘어놓아 힘들겠지만 “그래 오빠, 같이 가자. 우리가 함께 가면 엄마가 놀라며 좋아하시겠다.” 라고 대답했다. 혼자 있는 사람들은 누구와 말할 기회가 있으면 가슴 속의 얘기를 활화산처럼 쏟아내곤 한다. 그래야 그들도 삶의 중심을 찾는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보스코는 방한 중인 바티칸 외무장관 갤러거 대주교가 명동성당에서 7시에 한국주교단과 미사를 집전하고, 미사 후에는 서울교구장 염추기경이 장관과 신임교황대사 그리고 주교단을 초청한 만찬에 바티칸 전(前)대사들을 함께 초청한 터라 명동으로 나갔다.


대사석에는 보스코의 전임인 배양일대사, 후임인 김지영대사, 그리고 최근의 한홍순대사와 정종휴대사가 와 있더란다. 미사 후 교구청 홀에서 만찬이 있어 주교들과 모처럼 인사를 주고받는 시간을 갖고서 11시가 다 되어 귀가하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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