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서 SNS메시지로 예멘 난민 관련 내용을 하나 받고 “샬롬! 주님의 평화가 후배에게~” 라고 보냈더니, 다시 이런 톡이 왔다.
“어떤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슬람권은 무섭고 싫은 맘이라….”
이렇게 다시 메시지가 와서 후배에게 글을 쓰려다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었다.
“크리스챤은 누구냐?”라는 물음에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제자겠지요”라고 대답하고 싶다. 예멘 난민 사태로 거짓뉴스가 난무하고 각종 혐오와 음해가 진실인 양 포장되어 있다.
요즘 예멘 난민을 보며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대화하려고 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보고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창세기를 읽다가 사라에게 쫓겨난 이스마엘과 하갈을 보며, 우린 이삭을 지키려는 사라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쫓겨나는 아들 이스마엘과 하갈을 보며 물 한 부대로 자신의 손을 씻으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사막에서 목마름으로 죽기 직전 하느님이 개입하신다. 천사를 보내시어 “하갈아,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느님께서 네 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내가 네 아들 이스마엘을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리라”고 이르신다.
성서는 거꾸로 읽어야 제대로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때가 있다. 유대주의가 곳곳에 지뢰처럼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뢰를 제거하지 않는다. 이런 지뢰를 제거하지 않고 믿으면 기독교 근본주의가 되고 만다.
성서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스마엘의 하느님은 찾아볼 수 없다. 유태인들의 성서에서 하느님은 이스마엘의 하느님임을 살짝 가려버린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느님은 이스마엘의 하느님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이스마엘의 하느님인 것이다.
자신의 자식인 이삭을 지키려는 애처로운 모성이야 이해하지만, 사라는 강제로 아브라함의 방에 굳이 자신의 몸종 하갈을 넣어주고 자신으로 인해 말미암아 태어난 이스마엘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라의 선택이었으며 그의 집요함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난 요즘 사라에게 쫓겨나 사막에서 울고 있는 이스마엘을 만난다. 그의 어미는 자식이 거리에 내몰려 있음에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또 보내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유태 땅에서 유대중심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반유대주의자이다. 그는 안식일주의, 남성주의를 반대했으며 율법주의에 대항했다. 요한이 죽은 뒤에 등장한 예수라는 갈릴래아의 청년은 예루살렘의 부자들과 헤롯당들, 바이사이파에 의해 혐오와 음모가 난무한 거짓뉴스에 시달렸다. 결국 유월절에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유태인들의 뜻대로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게 된다. 어찌 이 땅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죽음의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는 말인가?
예수의 죽음은 예수가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반율법주의자였으며 반남성주의자, 반안식일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 대한민국의 예수는 반기독교주의자일 것이고 반남성주의자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여전히 가난한 자들과 함께 밥을 나누며 노숙자들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고, 난민이 된 예멘 청년들을 만나 “샬롬~ 말라이쿰(너희에게 평화가)!”하며 인사할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근본주의 형태로 변질된 이상한 기독교를 초월할 때,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