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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그래도 갈비가 나가고 머린 안 다친 게 고맙고로’
  • 전순란
  • 등록 2018-08-03 10:46:34
  • 수정 2018-08-03 10: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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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일, 맑음


해 뜨는 시각 오렌지색 너울을 쓴 산청 왕산, 점잖게 비스듬히 돌아앉은 지리산이 ‘8월이라니 몸 좀 쉴까?’ 하는 본새로 아직은 약간 선선한 아침 공기에 묵념을 하고 있다. 지리산의 삶을 늘 풍요롭게 만드는 풍경이다.



담 주 월요일에 외교부와 회의가 있다고 일시 귀국하는 큰아들 빵기에게 여름이면 내가 해 주던 음식이 생각나 어젯밤 호박잎 국을 끓여 얼리고, 콩국을 해서 병병이 담아 냉동실에 줄을 세웠다. 한 병쯤 먹이고 나머지는 제네바에 싸 보낼 생각인데 가져가 줄지는 모르겠다. 빵고와 오신부님도 이번에 해간 콩국에 국수를 말며 좋아했었다. 빵고신부는 어려서 부터 콩국을 좋아했으니까…


콩국을 만들고 남은 비지를 바가지에 담아 밤늦게 인규씨네 외양간엘 갔다. 겁 많고 비루먹은 개가 사료 값을 하느라 열심히 짖는다. 비지 한줌을 던져주며 입을 닫으라 했건만 기어이 초저녁잠을 주무시던 엄니를 깨우고 말았다. ‘뉘고?’ ‘엄니, 나 교수댁이에요.’ ‘이 한밤중에 뭔 일?’ ‘소한테 콩비지 좀 주려구요.’ ‘올라오기라.’


머리맡에 밀어둔 귀퉁이 떨어진 밥상에는 물에 만 밥과 상추 몇 닢이 전부. 된장도 풋고추도 안보이고… ‘찬이 없어 밥 묵으락카지도 몬한다.’ 밥이 안 넘어가 맹물에 말았는데 그것도 먹기 싫어 상을 물린 참이란다. 인규씨 행방을 물으니 나흘 전 깜깜한 밤중까지 고추밭에 물을 주다 비탈에 미끄러져 그만 갈비뼈가 부러져 읍내 성심병원에 입원중이란다. 몸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몸 하나는 성해야 하는데, 큰아들이 아프다니 밥이 입으로 들어가나 코로 들어가나 모르겠다는 말씀.



그렇지 않아도 폭폭한 삶. 요즘은 한더위로 공사장 막일도 없어 농사만 하는데, 돈도 안 되는 일이 해 넘어 어둘녘까지도 끝이 없단다. 그래도 넘어지며 ‘갈비가 나가고 머린 안 다친 게 고맙고로’ 하시는 엄니의 낙천적인 말씨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 새 내가 들고 간 비지 바가지에 오늘 짰다며 들기름 한 병과 농익어 배가 툭툭 갈라진 토마토를 가득 담아서 주신다. 반달로 찌그러져 가는 달이 내 발걸음을 비춘다. 


아침에는 10시 30분까지 미루네 산청 매장에 도착하여 냉커피를 대접받고서 남해 미조항으로 떠났다. 귀요미 미루가 마련한 우리 두 부부의 하루짜리 여름휴가. 남해 파스칼 형부가 단골식당 ‘삼다도’에서 삼복을 보양하라며 우리한테 전복죽을 사주셨다. 계속되는 여행과 손님 대접으로 내가 지쳐 있을까봐 자상히 배려해준 맘씨다.



남자만 다섯인 집에서 자라셨다는데도 그 분 안에 내재한 여성성은 각별하다. 반면에 언니는 굵은 심줄 같은, 든든함과 관대함이 있다. 요즘이 한참이라는 홍합은 알도 굵고, 형부를 ‘오라버니’라 부르는 식당주인 해녀가 아침에 물질해왔다는 소라는 다디달았다. 남은 죽을 싸가겠다니 형부가 아예 2인분을 넘치게 통에 싸줬다. 집에 와서 요즘 블루베리 따느라 고생하는 진이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오늘은 남해바다가 유난히 푸르렀다. 하늘엔 더운 여름구름들이 돛대를 달고 미끄러져 간다. 점심 후 재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그리고 올 봄에 봉재언니네랑 다녀갔던 ‘독일마을’의 ‘쿤스트 라운지’라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예전 한산하던 카페가 휴가철이라 집은 떠나왔지만 무더위에 갈 곳을 잃은 젊은 가족들로 워낙 붐벼서 옹색한 식탁에 여섯이 비집고 앉아 못 다한 얘기를 나눴다.



남해에서 돌아오다 5시경 성심원에 들러 그곳에 차려진 ‘카페 보눔’에서 새로 차린 메뉴 눈꽃빙수를 시켜 먹었다. 그곳에 사는 환우들에게 날마다 무료로 대접하는 카페다. 커피의 명인이자 바리스타인 원장 비안네 신부님의 솜씨는 서울정동 ‘다미아노’에서 익힌 것이란다. 유신부님도 오랜만에 뵈었다. 늘 주변에 넘치는 사랑을 베푸는 프란치스칸들로 더욱 풍부한 나날이 흐르는 성심원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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