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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배울까?
  • 김유철
  • 등록 2018-08-14 12:02:09
  • 수정 2018-08-16 18: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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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청와대)


문재인대통령과 중국 대학생


문재인대통령이 작년 12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베이징대학교에서 ‘한중 청년의 힘찬 악수, 함께 만드는 번영의 미래’를 주제로 연설했다. 문대통령은 당시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으며 동시에 향후 한중 미래 25년의 상대가 될 중국 대학생을 상대로 양국의 상호 소통과 협력의 중요성을 말하며 “20세기 초 여러분들의 선배들은 5·4 운동을 주도하며 중국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문대통령은 1920년대 베이징대에서 수학했던 이윤재 선생을 소개하며 이어서 18세기 북학파라 불린 박제가와 홍대용을 언급했다. “박제가는 베이징을 다녀온 후 중국을 배우자는 뜻으로 ‘북학의’라는 책을 썼다”며 “같은 시대 베이징에 온 홍대용이란 학자는 엄성, 육비, 반정균 등 중국학자들과 ‘천애지기(天涯知己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알아주는 각별한 친구)’를 맺었다”고 말했다.


‘북학파’는 국가보안법 위반?


근간에 출간된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창비, 2018)에서도 ‘북학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주로 송나라 성리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발전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오랑캐라는 멸시와 그들에게 당했다는 적개심 때문에 북벌론과 소중화 사상 같은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곧 조선 후기에 나타난 실학사상의 한 줄기였다… 박제가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북학北學이라고 했다. 북학이란 <맹자>에 나오는 표현으로, 이상보다는 현실, 관념보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한다는 뜻이다.’(42-65쪽 참조)


18세기 초 당시로서는 “무찌르자 오랑캐” 슬로건을 앞세운 ‘북벌’을 국론으로 삼던 시절에 “오랑캐로부터 배우자”며 ‘북학’을 말하는 것은 요즘 말로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겠지만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로 보자면 배움이 없는 곳은 없다. 누구에게라도, 무엇으로부터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배운 바를 내 것으로 만드는 체화를 통하여 자신의 진면목을 바탕으로 연대하고 그것을 사회개혁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더 할 나위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와 카를 마르크스



1517년 10월 31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하루 전 날 독일 비텐베르크성 북문에 라틴어 문장들로 쓰인 종이가 걸렸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의 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한 일이었다. 훗날 교회사가들은 그것을 〈95개조 반박문〉이라 불렀던 문서였다. 그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서구의 역사는 격동과 함께 대변혁을 가져왔다. 당시로서는 루터의 종교적 파문을 가져온 ‘못된 놈’ 사건이었지만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667년에 와서야 이 날을 ‘종교개혁의 날(Reformationstag)’로 사람들은 불렀다.


1818년 5월 5일 독일 프로이센 트리어의 유대인 랍비 집안에서 태어난 한 사내아이가 19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자본론』의 집필자이자 철학자, 혁명가, 경제학자 등으로 불리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다. 그는 평생 동안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의 역사관을 주장했고 저술했다. 신영복 선생은 ‘내 인생의 한 권의 책’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 권’이 아니라 빼놓을 수 없는 ‘세 권’을 추천했는데 그 중의 한 권이 『자본론』이었다. 근래에 영화 <청년 마르크스>가 개봉되었는데 역사는 진보와 보수의 영원한 구도 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시대 속으로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엥겔스와 함께 1848년 발표한 ‘공산당선언’을 이유로 그를 죄악시하고,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후로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흘러간 ‘빨갱이’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학·종교개혁·자본론·사회교리


▲ 2017 사회교리주간 영상 중 (사진출처=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미디어부)


글 서두에 말한 ‘북학’이 ‘실학’이란 관점을 지닌 소수의 조선학자들이 ‘천주학’에 눈뜰 수 있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 500년·마르크스 200년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배우고 그것을 ‘한국천주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로마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사목헌장을 1965년 발표했고, 반포 40주년을 맞아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지난 2005년 『간추린 사회교리』를 발간했다. 


교황청이라 불리는 가톨릭교회는 당시로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수용할 수 없고 단죄하고 도외시했지만 ‘사목헌장’도, ‘사회교리’도 그들에게 분명 한 수 배운 것이다. 세상 어디에나 반면교사가 있듯이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 하나 스승 아닌 것이 없다. 스승이 있어서 제자가 있겠지만 제자 될 마음이 있는 곳에 스승은 나타나는 법이니 고개 돌려 옆을 보면 사실 온통 스승 천지다. 한국천주교회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더불어 숲이다. 그렇게 살자.


좀 잊힌 듯하지만 2000년 대희년을 맞으며 로마교황청과 한국천주교회는 하느님과 세상 앞에 죄를 고백하고 새롭게 살 것을 다짐했다.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시여. 당신은 항상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박해받고 투옥되고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는 이들을 외면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부와 권력을 가졌고 하느님에게 가까운 소수라는 사실을 뽐내며 부정을 저질렀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다. (2000년 3월 12일 사순절 미사를 겸한 ‘용서의 날 미사’The Day of Pardon Mass )


한국천주교회는 ‘쇄신과 참회’ 기도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아울러 교회의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잘못으로 상처받은 분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우리는 참회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고 했다. (2000년 12월 3일 대림 첫 주일미사) 더불어 숲이다. 그렇게 살자.


▲ 고 신영복 선생의 서화 ‘더불어숲’ (사진출처=더불어숲)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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