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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웅배) 거짓증언의 다른 이름, ‘가짜뉴스’
  • 김웅배
  • 등록 2018-08-17 10:15:06
  • 수정 2018-08-17 18: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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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지인으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여든이나 되신 분인데 언젠가부터 카톡을 개설하시고는 유모어나 좋은 글, 의학상식 등 많은 정보를 보내주셔서 나름 재미있게 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세 번에 한 번 꼴은 한국에서 기승을 부린다는 가짜뉴스를 진짜로 여기고 보내곤 하신다. 저녁에 받은 카톡은 당연히 가짜뉴스였다. 


최근에는 매일 일방적으로 보내오는 카톡이고 어이없는 내용이 너무 많아 잘 보지 않고 웬만해서 답글은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수학여행 가다가 사고 난 세월호 학생들이 무슨 순국열사인양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니 정신분열증 나라에 소돔과 고모라라며 한껏 큰일 났다는 식의 내용이었고 정신 나간 정권의 빨갱이들을 없애야 한다는 글이었다. 하도 상식적이지 않은 뉴스가 많은 세상이라 얼핏 그랬었나? 하는 의구심에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국가기간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 발 기사를 보니 세월호 학생들이 안장된게 아니라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하려다 희생된 인솔 선생님들 아홉 분이 의사자 순직 공무원으로 인정받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금년 1월의 뉴스였다. 그런데 그 뉴스가 8월에 와서 언급이 된 이유가 뭘까? 가짜뉴스 제작자들이 그 뉴스가 독자들 뇌리에서 어렴풋이 사라지기를 기다린 건 아닐까?


지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연합뉴스 기사를 링크해서 “가짜 엉터리 이간질 뉴스 좀 퍼나르지 마시고 생각 좀 하고 삽시다.” 라고 한줄 보탰다.


생각 좀 하고 삽시다.


미국의 동포사회는 좀 폐쇄적이긴 하지만 카톡상에서는 중년이고 노년이고 가리지 않고 고국에서 시공간에 제한 없이 넘어오는 가짜뉴스는 거르지 않고 스폰지처럼 빨아들인다. 그리곤 그걸 받아 아무에게나 보낸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혹시 껄끄럽지 않을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며, 그런 내용을 실제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이건 꼭 알아야 된다며, 나중에 오프라인에서 만나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다.  


이 분은 평소 내가 참 좋아하는 분으로 오랜 미국생활에 젊은 시절 고생도 많았지만 자식들도 잘 키웠고 지금은 부부가 은퇴생활을 즐기고 계신다. 유모어도 많고 대화도 재미있게 하셔서 정말 만나면 즐거운 분인데 한국의 정치 사회 문제에 관한 한 수구골통(?)이어서 농담 삼아 은근히 핀잔도 가끔 주지만 그래도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잃지 않으신다.


6·25 당시 국민학교나 중학교 다녔던 연배라서 반공에 대한 의식이 투철하고 박정희 우상화(?)가 몸에 배어있어 아무리 얘기를 해도 좀처럼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이런 분들도 이젠 이명박이 잘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그래도 난놈은 난놈이라며 해쳐먹은 것도 능력이란다.) 박근혜에 대해서만큼은 아직도 동정적이다. 여기 사는 나이 드신 분들 중, 대개는 유튜브가 무슨 진실이나 사실을 전달하는 일반 방송 채널로 알고 있으니 그게 아니라는 설명을 하기가 여간 간단치가 않다. 카톡도 자신의 뜻을 전달하거나 대화를 위한 것이기 보다 99%가 가짜뉴스나 떠도는 남의 글을 퍼나르는 수준이고 카톡이란게 그렇게 해야 하는 매체인걸로만 알 정도이다. 


가짜뉴스의 폐해는 심각할 정도다. 예전 같으면 ‘에이 치워라’ 하며 무시했지만 지금은 sns상에 활자화가 되거나 유튜브를 통해 사실처럼 보이는 뉴스를 청각, 시각적으로 들이대기 때문에 못 본 듯 하기도 쉽지가 않다. 게다가 이런 가짜뉴스가 가짜라는 것이 판명 나도 그걸 퍼나른 사람들은 아무런 동요가 없다는게 큰 문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투다. 그리고 결국에는 가짜뉴스라 해도 그냥 넘어가며 또 다른 가짜뉴스에 열광(?)한다. 


퍼나른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자신이 만든게 아니고 그냥 전달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반응은 항상 ‘아니면 말고’ 식이다. 물론 가짜뉴스이지만 종북 프레임만큼은 확증편향성에 의해 더욱 강고해지면서 그의 사고체계는 종북빨갱이 척결로 고정화 된다. 그 가짜뉴스의 진짜 목적은 세월호에 대한 가짜 뉴스를 전파하는게 아니라 문재인 정권이 김정은에게 나라를 바칠 것이니 ‘태극기 애국세력은 일어나라’이다.


▲ ⓒ 가톨릭프레스 DB


군사문화를 겪은

우리 나이든 사람들의 민낯


보통들 이민자의 경우, 한국을 떠날 때 나이의 의식 수준으로 외국에서 산다는 말을 한다. 급격한 환경 변화로 모든 사고가 일순 정지가 됐다는 면에서 일견 수긍도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게 있다면, 한인 이민자들은 교육 수준도 높아 미국 사회의 합리적인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라는 훈풍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떠나 온 한국 사회는 독재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비민주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동포들은 미국 사회가 교육에도 엄청난 투자를 하고 이들의 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래서 자식들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상당수다. 미국에 살며 복지문제도 타민족과 별로 차별을 느끼지 않는다. 가끔 아닐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요즘 트럼프로 인해 좀 면구스럽게 되긴 했으나 일반 정치문제만 해도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이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인들의 수준은 우리 한국의 자기 비하, 자해성 막말 정치인들과는 그 격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민주국가 미국에서 수십 년 살아온 동포들이 한국의 보수라고 칭할 수도 없는 탐욕적 수구 무리에게 경도되어 왜 그쪽 사고에 치우치는지 그 이유는 정말 모르겠다. 그것도 민주주의의 원조인 미국에 살면서 아직도 박정희를 그리워하며 그 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좀 심하면 한국은 독재를 해야 한다는 자조적인 말로를 웅변하듯이 외친다.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의 광우병 사태 이래 박근혜 탄핵 퇴진 촛불시위를 전혀 인정치 않으면서, 엽전(조선놈)들은 쥐어 패야 말을 듣는다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그것도 민주국가인 미국 시민이면서.  


지난 촛불시위 때 태극기, 성조기를 흔들며 계엄을 선포하라고 외쳤던 무리와 닮아도 너무 닮았다. 한국인은 계엄령 하에서 살아야 한다는 자조, 자학적 의미가 발판이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발상이다. 해체 수준의 결과를 초래한 기무사 문건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제를 겪고 30여년 간의 군사문화를 겪은 우리 나이든 사람들의 민낯이다. 우리도 모르게 생각의 뿌리조차 왜색과 병영 문화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가랑비에 옷 젖는지도 모르면서 살아왔고, 그 관성이 미국에서 30,40년을 산 사람에게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러나 4·19를 거치고 한일회담을 반대하고 유신헌법을 철폐하라고 고함을 치던 세대가 지금의 70,80대들인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정신과 마음을 다해 박정희 무단 군사 정권에 대항했던 ‘오적’의 김지하의 변신이 신비롭다! 


가짜뉴스는

거짓증언의 다른 이름


지금 기무사 해체문제라든가 거론하고도 싶지 않은 양승태 대법원 문제도 본질은 같다. 군사 독재 문화의 찌꺼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박정희식 국가경영을 정당화하고 그래도 어쨌든 잘 살게 되지 않았냐며 수구 진영이 켜켜이 쌓아 온 낡은 반공 이념을 교조처럼 여기는 박근혜를 감싼다. 남북화해가 현실이 된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안다. ‘시대의 징표’라는 명제 자체를 아예 사고체계 밖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이들은 ‘종북좌빨 척결’을 위해서라면 친일 행위는 물론, 부정부패도 용서해야 한다는 논리를 ‘애국’이라는 매우 애국적인 단어로 덧칠을 하며 내세우고 있다.


세상이 온라인의 활발한 소통으로 뭔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꼰대들의 세계’는 오히려 이 소통의 장이라는 온라인에서 말라비틀어진 거북등처럼 더욱 경직되어 가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 현실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가짜뉴스에 의해 날조된 조작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꼰대’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가짜뉴스는 우리 판단력은 물론 상식적 분별력도 흐리게 만든다. 그것은 대부분 사실에 기초를 두고 살짝 다르게 왜곡시켜 정상적인 사람들조차 현혹시키기 때문이다.


가짜뉴스란 요즈음 SNS시대에 나온 신조어 같긴 하지만 사실상 ‘거짓 증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모세의 십계명에 박혀 있을 정도로 원초적 금지 행위이다. 거짓 증언도 사실에 기반 한다. 완전 거짓은 들통 나기도 쉽고 소설 쓰냐는 비아냥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의 부분적 왜곡의 결과는 화살이 활시위를 떠날 때, 방향이 미세하게라도 틀리면 착지 부분에서 엄청난 차이가 생기는 것과 같다. 또 거짓 증언이란 일반적으로 이해 당사자들끼리 치고 박는 싸움 끝에 개인적 상황에서 나온다. 그러나 가짜뉴스는 이해 당사자도 아닌데 불특정 다수에게 진짜 뉴스인 것처럼 공개적으로 확성기를 틀어놓은 꼴이니 그 듣기 성가심은 말할 것도 없고 자꾸 반복되면 가짜가 사실이 되는 듯한 착시효과를 부른다.


최고 의회의 유다 지도자들은 그들의 눈엣가시 같은 예수에게 무슨 죄목을 씌울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면서 각종 증언을 녹취했지만 별 도움이 안 되는 엉터리 증언뿐이라 깊은 고민에 빠진다. 예수 발언의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많은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거침없는 발언을 하셨기 때문에 ‘악의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예수의 말씀 중에서 증거를 찾아 두 사람이 이를 제시한다. 두 사람인 이유는 한 사람이 증언하면 증거로 채택되지 않기 때문이다. 좌우간 세세한 법은 다 지키며 사람을 죽이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리를 따지는 이런 권력기관의 행태는 여전하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거짓 증언을 찾았다. 거짓 증인들이 많이 나섰지만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이자가 ‘나는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고 했다. (마태 26, 59-61)



더러는 나서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마르코 14, 57-59)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마르코 13, 1-2)


그러나 이들의 증언에 반하여 당시의 정확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 18-21)


거짓 증언의 전형이며

가짜뉴스의 원조


첫 번째, 마태오 복음을 보면 두 증인은 예수께서 하지도 않은 말을 보탰다. 예수는 너희들 중에 누가 성전을 허물면 내가 다시 성전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지 본인이 성전을 허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성전이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비유로 밝히셨다. 성전을 허물라는 말은 수사적 과장일 뿐이며 실제로는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 강조구문이다. 증인들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교묘한 왜곡을 한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들 중에 선생님들이 대전 현충원에 묻힌 건 사실이다.


두 번째, 하지 않은 말을 보탰을 뿐만 아니라 확실치 않게 들은 말을 확실한 말인 것처럼 꾸민다. 그들이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앞서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부분은 확실한 왜곡이다. 게다가 증언을 하는 태도도 소위 ‘카더라 방송’ 식이다. 거짓 증언의 전형이며 가짜뉴스의 원조이다. 나아가서는 다른 곳에서 다른 의미로 성전 파괴를 에언 하신 말씀을 (마르코 13, 1-2) 견강부회(牽強附會)하여 성전을 파괴하라는 선동으로 몰고 갔다. 


견강부회를 더 한다면 민초들이 세상을 한탄하며 “에이, 이눔의 세상 뒤집어져라!”하는 푸념을 반란 모의로 뒤집어씌우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통진당 해체 발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짜뉴스의 발원지는 어디이며 누가 만들고 누가 전파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에 대한 대답을 위의 성경 구절에서 찾는다.


기득권층이며 수구세력인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가 그 진원지였고, 가짜 증인들의 위증으로 그들이 고용한 성전 경비병(국정원, 기무사)들을 통해 가짜뉴스를 온 세상에 확산시켰다. 성전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들과 함께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요한 19, 6) 예루살렘 입성 때 호산나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던 예수의 지지자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외칠 때까지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가짜뉴스 항의에 대한 답글은

건강힐링 정보


지금도 과거의 향수 속에서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세력들은 카톡 안에서 여전히 준동(蠢動)하고 있다. 스티브잡스가 추구한 ‘새로운 세상’의 카톡은 순기능이 상실된 채, 악마적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 완전히 자리매김을 한 걸까? 


날이 바뀌어 이 글을 쓰는 동안 나의 답글을 보신 지인의 카톡 답글은, 국가기간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의 세월호 진짜 뉴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어느 나라의 ‘건국’인지는 몰라도 ‘건국70년’에 ‘애국 시민께 보내는 글’이었는데 바로 박근혜 탄핵 인용에 아주 지대한 공헌을 하신, LA에 사신다는 김평우 변호사가 애국 동포에게 보내는 글이었고, 20분 후에 바로 이어서 보낸 것은 종북척결을 외치는 어느 모르는 이의 페이스북 링크였다.


그리고는 건강힐링 정보를 보내 오셨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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